盧 “사죄할 일만 남았다”… 도덕성파산 이어 정치파산 선언?

  • 입력 2009년 4월 23일 02시 58분


문 前실장 무거운 발걸음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서면질의서를 발송한 22일,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왼쪽)이 김경수 비서관과 함께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의 노 전 대통령 사저로 들어서고 있다. 김해=연합뉴스
문 前실장 무거운 발걸음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서면질의서를 발송한 22일,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왼쪽)이 김경수 비서관과 함께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의 노 전 대통령 사저로 들어서고 있다. 김해=연합뉴스
■ ‘항변 창구’ 홈피 폐쇄

“여러분의 상징 될수 없다”

정상문 구속 盧에 결정타

일각 ‘마지막 승부수’ 해석도

“도덕적 신뢰가 바닥이 나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제 할 일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일이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사법절차, 하나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의 서면질의서가 발송된 22일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이 같은 글을 띄웠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시작된 이후 여섯 번째다. 다만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에 반박하던 예전의 모습과 달리 이번에는 홈페이지상의 절필(絶筆)을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 폐쇄 결정은 막역한 친구인 정상문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이 공금 횡령으로 구속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은 “오랜 친구가 저를 위해 한 일인데 제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느냐. 말을 하더라도 저를 더욱 초라하게 하고 사람들을 더욱 노엽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홈페이지 폐쇄 선언은 검찰 수사에 대한 ‘항변 중단’ 선언이자 ‘대외활동 중단’ 선언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친형 노건평 씨가 구속되면서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 앞에서 방문객을 맞는 일을 중단했던 노 전 대통령에게 홈페이지는 유일한 외부와의 소통수단이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사법절차 하나만 남아 있다’는 말로 인정했듯이 그는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파산한 상태다. 퇴임 후 친환경사업이나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 기여하겠다던 구상은 이미 물 건너갔다. 퇴임 직전까지도 “대통령을 그만두면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으로 남고 싶다”며 정치활동 재개를 꿈꿨지만 이제는 구속되느냐, 마느냐를 걱정할 처지가 됐다. 그는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며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고,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앞두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는 해석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에도 고비 때마다 상식을 뛰어넘는 승부수를 던지며 정면 돌파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글이 이날 오후 5시 53분쯤 뜬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홈페이지에는 “폐쇄를 반대한다”는 댓글 수백 개가 잇따라 올랐다.

민주당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의 비리 혐의에 대해서는 철저히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면서도 착잡해했다. 노영민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의 글이 전해진 뒤 호칭도 생략한 채 “노무현은 이제 역사가 되어버렸다. 모든 평가도 역사가 할 것이다”라고 단 두 줄짜리 논평을 냈다. 정장선 의원은 “전직 대통령이 원로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단죄돼야 하는 현실은 국가와 국민, 정치권 모두에 너무나 큰 불행”이라고 말했다. 한 386 원외 지역위원장은 “그토록 ‘개혁’과 ‘도덕성’을 내세웠던 노 전 대통령의 추락은 참담 그 자체”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이날 검찰이 노 전 대통령에게 서면질의서를 보낸 것에 대해 일제히 전직 대통령에 대해 예우를 갖춘 것이라고 환영하면서도 미묘한 시각차를 보였다.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재하는 절차를 반복하지 말고 문제를 사실대로 밝힐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조사 형식보다는 공정하고 정확한 수사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일단 서면조사를 한 뒤 소환조사는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盧, 홈피 폐쇄하며 올린 글 <요지>

‘사람세상’ 홈페이지를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처음 형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설마’ 했습니다. 설마 하던 기대가 무너진 다음에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용서 바랍니다’ 이렇게 사과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적당한 계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500만 불, 100만 불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도, 도덕적 신뢰도 바닥이 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전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국민들의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생각한 것은 피의자로서의 권리였습니다. 도덕적 파산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피의자의 권리는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이라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가는 검찰과 언론의 추측과 단정에 반박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상문 비서관이 ‘공금 횡령’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마당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면목도 없습니다. 그는 저의 오랜 친구입니다. 저는 그 인연보다 그의 자세와 역량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위해 한 일입니다. 제가 무슨 변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를 더욱 초라하게 하고 사람들을 더욱 노엽게만 할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정치적 입장이나 도덕적 명예가 아니라 피의자의 권리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이것도 공감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사법절차 하나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적어도 한 발 물러서서 새로운 관점으로 저를 평가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009년 4월 22일 노무현

▶ 동아닷컴 인기기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