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부장판사 글 전문

  • 입력 2009년 3월 18일 20시 07분


<서울중앙지법 정진경 부장판사의 글>

최근의 사건에 관한 소견

신영철 대법관과 관련한 진상조사결과가 나온 현재의 시점에서 이제는 침착하게 사건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올립니다.

저는 신영철 대법관의 행위가 다소 지나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신영철 대법관을 옹호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논의과정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재판권과 사법행정이 정확히 양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건의 실체에 관한 유무죄 판단이나 양형의 문제는 재판권에 속하는 것임이 명백하지만 사건의 절차에 관한 문제는 재판권과 사법행정이 교차하는 영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과의 관계에서 법원 전체의 신뢰를 생각하여야 하는 법원장이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된 사건들에 관하여 자신의 절차진행에 관한 견해를 개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절차에 관한 문제도 실체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여하튼 법원장의 절차에 관한 의견 제시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현재 상황의 문제입니다.

신영철 대법관의 거듭된 의견개진을 문제 삼는 가장 큰 이유는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과거 법원장이 정치권력의 주문을 그대로 재판부에 전달했던 시기와는 현저히 다릅니다. 최근의 사건은 법조선배로서 경험이 앞서는 법원장이 법관으로서의 자신의 견해를 후배들에게 제시한 것으로서 문제의 본질은 법관의 독립에 대한 침해라기보다는 사법관료화와 의사소통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법관의 경험의 문제입니다.

저는 법관의 독립이 법관의 독단을 용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우리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 바로 법관이 되고 있고 군법무관 제대자의 경우 불과 수 년 만에 재판장을 맡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행동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폭 넒은 인적 교류가 제한되어 타인을 판단하는 법관이 그 경험과 연륜에 있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현저히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재판장이 되면 타인이 자신의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최근의 사건에 있어서도 법관은 그 시위의 목적이 아무리 순수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저는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동기가 강한 시위였다고 생각합니다) 시위의 형태가 현행법에 저촉된 바가 있다면 그에 따라 결론을 내면 그만입니다. 판사의 입장에서는 진보세력이 보수정권에 대항하여 시위를 했건, 보수세력이 진보정권에 대항하여 시위를 했건 그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기를 놓친 형사처벌은 마치 김빠진 맥주처럼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의 형벌권의 행사가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이루어져 입법자의 의사가 실현되도록 하는 것은 판사의 중요한 의무이고, 판사는 적용될 법이 위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시위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의 범위내의 것이라면 무죄를, 그 범위를 넘어서 실정법에 위반된 것이라면 유죄를 선고하면 그뿐입니다. 과거의 예가 관행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법원장은 단독판사에 비하여 경험이나 연륜에 있어 앞선 법관이고 사법행정의 담당자로서 개개의 재판장보다 더 넓은 시각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경험이 부족한 재판장의 입장에서 이러한 법원장의 의견 제시는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조언입니다.

넷째는 이의제기의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법원장의 의견제시가 경청할 가치가 있는 조언이기는 해도 재판장의 의견과 다른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재판권과 사법행정권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사법행정은 재판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사법행정이 후퇴함이 마땅합니다. 재판장은 법원장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한 후 그에 따르는 것이 자신의 법적 양심에 반한다고 생각한다면 법원장에게 정중하지만 정확하고도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기가 어렵다면 동료들과 의논하여 함께 찾아가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법원장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면 절차를 거쳐 판사회의를 소집하여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사건의 재발을 막아야 합니다. 타인의 권리침해를 구제해야 하는 판사들이 법원 내부의 절차를 생략한 채 외부의 언론기관에 제보하여 여론의 힘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비록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이긴 하여도 법관의 독립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결과를 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최근의 사건을 계기로 가뜩이나 부족한 사법행정권자와 재판장들의 의견교환이 아예 단절되고 재판장의 재판이 독단에 흐를 위험성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비록 성가시고 다소의 압력으로 느껴진다고 해도 법원 내부에서 재판진행과 관련한 이견을 듣고 이를 충분히 소화하여 재판에 반영하는 것은 신뢰받는 재판을 함에 있어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최근의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는 현재의 관료화된 사법제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원장과 의견을 같이하는 경우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고 의견이 다른 경우라도 법원장에게 평정권이 없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개의 재판장의 나이나 경험이 자신과 유사하다면 감히 법원장이 재판절차의 진행과 관련하여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법원장과 판사가 대등한 미국의 경우에는 장기미제사건에 대한 보고 등을 직접 의회에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한 법원 내에서도 판사 사이의 경력에 있어 30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모든 판사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승진을 거듭하는 관료제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승진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법관평정제가 필요악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헌법에는 대법관과 일반법관밖에 없고 따라서 모든 판사는 동등하여야 함에도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며칠 전 어느 기자가 저에게 전화를 하여 신영철 대법관의 행위가 위법한 것이 아니냐며 그 거취에 관한 제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신영철 대법관의 행위가 위법한 것으로서 사직하여야 한다면 3인 합의의 취지에 반하여 합의부를 운영하는 저를 비롯한 재판장들과 3인 합의를 하자고 이야기함에도 업무의 편리만을 들어 2인 합의를 고집하는 배석판사들이 위법한 행위를 한 것으로서 모두 사표를 제출하여야 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사법관료화와 그로 인한 소통의 단절입니다. 제가 임용된 1989년에 비하여 20년이 지난 지금 판사의 수가 증가하고 인사의 투명성을 위해 도입한 법관평가제의 영향으로 법원의 관료화는 더욱 심해졌으며 이로 인하여 거대 법원에서는 법원장과 일반판사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거듭하여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제도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도 명확하니만큼 법조일원화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여야 함을 지적하여 왔습니다. 또한 우리와 같이 피아를 구분하는 사회에서 아무리 판사가 열심히 일한다고 하여도 판사가 남으로 인식되는 한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확보는 불가능한 것이니, 제대로 된 배심제를 도입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직접 재판에 참여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번 사건이 이러한 근본적인 사법시스템에 대한 검토와 개선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판사는 어떤 경우라도 다른 판사에 대하여 사직을 운운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의 신분은 헌법상 보장된 것이고 탄핵이나 금고 이상의 형에 의하지 않고는 퇴직시킬 수 없습니다. 현재까지 판사가 너무 쉽게 사직하다 보니 우리 사회가 판사의 사직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판사의 신분을 두텁게 보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판사가 법관의 독립을 이유로 법원장을 공격하면서 그 판사의 헌법상 신분보장을 침해하는 언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된 행동입니다. 판사의 거취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여론의 압박이 있다하여 이에 굴복하여 대법관이 사직한다면 내일 또 다른 여론에 의하여 다른 대법관이 공격받고 사직하게 될 수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해하게 될 것입니다. 판사는 헌법상 독립된 기관으로서 그 지위에 걸맞게 무게 있는 처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2009. 3. 18.

서울중앙지법 정진경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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