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은 쿠데타이지만 근대화혁명 출발점”

  • 입력 2008년 3월 24일 03시 00분


경성방직주식회사 직공들의 일제강점기 때 작업 모습. 사진 제공 기파랑
경성방직주식회사 직공들의 일제강점기 때 작업 모습. 사진 제공 기파랑
뉴라이트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출간

■ 기존 교과서와 주요 쟁점 비교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모임인 교과서 포럼(공동대표 박효종 이영훈 차상철)이 3년여 만에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기파랑)를 23일 출간했다. 2005년 1월 출범한 교과서포럼은 “현행 고교 검인정 근현대사 교과서(현행교과서)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좌파 편향적 역사인식을 심어준다”며 ‘대안교과서’를 집필해 왔다. 대안교과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념을 반영하면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세습왕조나 다름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라고 혹평하고 있다. 대안교과서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 일제강점기, 유신체제 등에 대한 평가에서 현행 교과서와 크게 다른 견해를 보여 논란이 예상된다. 이를 쟁점별로 정리했다.》




“단독정부 분단 초래” → “北이 먼저 정부수립”

좌 편향이라는 논란을 불러온 현행교과서는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초래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대안교과서는 “1945년 9월 소련 스탈린이 북한 군정에 독자 정권 수립을 지시한 뒤 1946년 북한 임시인민위원회가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골자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고 서술했다. 사실상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해 분단 조짐을 드러낸 쪽은 북한이라는 것이다.

현행교과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두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 등 우익이 찬성한 반면 좌익은 남한 정부 수립을 반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대안교과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 세력의 도전을 물리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고 평가했다. 제주도4·3사건과 여순 10·19사건에 대해서는 “남로당이 1948년 제주도에서 무장반란을 일으켰다…10월에는 여수와 순천에 주둔 중이던 국군 제14연대에서 남로당에 포섭된 장교와 하사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서술했다.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실증주의가 기본정신”이라며 “현행교과서는 역사적 사료와 사실 그 자체를 전하지 않고 왜곡하거나 숨겨 온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수탈과 저항의 역사” → “근대국가 경험 축적”

대안교과서는 일제강점기를 수탈과 저항의 역사로 보는 현행교과서와 달리 “이 시기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경험’이 축적됐다”고 설명한다.

이런 관점은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재연시킬 것으로 보인다. 교과서포럼은 논란을 감안한 듯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박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견해는 반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안교과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에 대한 정치적 차별과 억압을 동반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으나 실증 사료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경제 발전과 시장경제의 기반이 마련된 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조선민사령을 그 예로 들었다. 한국을 지배할 목적의 법령이지만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절대적 권리로 인정한 결과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인의 사유재산권과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 한국인도 근대적 사권(私權)의 주체가 됐다는 설명이다. 현행교과서가 일제의 경제 침탈로 보는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도 “국가가 토지재산에 대한 증명제도를 완비함으로써 토지 거래가 활성화하고 토지를 담보로 한 금융이 발전했다”고 기술했다.

“독재체제로의 전환” → “중공업화 강력 추진”

대안교과서는 5·16을 “일부 군부 세력이 헌법 절차를 거쳐 수립된 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한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2006년 11월 공개된 시안에서 5·16쿠데타를 ‘5·16혁명’ ‘5월 혁명’으로 표현했다가 논란을 빚은 부분을 수정한 것이다. 박 교수는 “집필자들이 고민을 거듭한 결과 5·16 자체의 역사적 사실은 쿠데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대안교과서는 “(5·16쿠데타는) 근대화라는 국민적 과제를 수행할 능력이 결여된 옛 정치 세력과 그에 도전한 급진이념의 정치 세력을 모두 대체할 새로운 세력이 국가권력의 중심부를 장악한 일대 변혁”이라며 “군인 특유의 추진력과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경제 발전을 추진해 1961년 이후 35년간 연평균 7∼8%의 고도성장을 거듭했다”고 서술했다. 이어 5·16쿠데타가 “1987년까지 이뤄진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현행교과서와 마찬가지로 “대의제적 민주주의 정치 원리는 소멸했으며 명령에 의한 행정이 지배하는 행정 국가가 전면에 등장하였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10월 유신은 개인의 권력욕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커다란 변화를 안겨줬다. 박정희는 행정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 체제로 나아간 것이 유신체제”라는 현행교과서와 크게 다른 평가다.

“외세 조선침략 촉진” → “주역들 근대화 추구”

현행교과서는 갑신정변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처음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사건으로 큰 의미가 있지만…외세의 조선 침략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대안교과서는 “갑신정변이 성급했던 것은 사실이지만…갑신정변의 주역을 근대화를 추구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선각자로 봐야 한다”고 서술했다.

대안교과서는 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봉기로 표현했다. “동학농민봉기가 종래 급진적인 사회혁명으로 평가돼 왔으나…유교의 근왕(勤王)주의에 입각한 복고적인 개혁의 성격이 강했다”고 서술했다.

체제변화 상세 서술 → 책 맨뒤에 ‘보론’으로

교과서포럼은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정해 온 북한 수령 체제의 역사를 대한민국 현대사와 병렬로 다룰 수 없다”며 북한 현대사를 책 맨 뒷부분에서 ‘보론’으로 다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과정을 서술하면서 “북한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전체주의적 사회를 성립시켰다”고 비판했다. 북한 현대사를 4단원 ‘현대 사회의 발전’에 포함시켜 북한 체제의 확립과 변화 등을 서술한 현행교과서와는 상반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통일 국가의 이념적 토대를 명확히 하지 않아 남한 내에서 심각한 체제 논쟁을 유발했다”고 서술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1919년 경성방직 출범으로 수입대체 공업화 시작”▼

인촌 선생 사진과 함께 소개

대안교과서는 ‘식민지의 경제적 변화’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경제참여를 실증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하며 한국인의 경제활동과 한국인 자본의 축적을 평가했다.

대안교과서는 “(한국인 공장은) 1910년대 초에 100개도 안 되었으나 1930년대 말에는 4000개를 넘었다… 전체 공장에서의 비율도 60%를 넘었다”고 한국 경제인의 진출 상황을 설명하고 “불리한 여건에도 한국인 상공업자들은 공장을 건설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수완을 발휘했다”고 서술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인촌 김성수 선생이 1919년 10월 주도하여 제1회 납입자본금 25만 원으로 창립한 경성방직주식회사를 들었다. 경성방직에 대한 별도 박스를 만들어 “1910년대 말까지 한국에서 소비된 면직물의 75%가 일본 제품이었는데 경성방직이 출범함으로써 면방직 부문에서의 수입대체 공업화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는 낮은 인지도와 취약한 판매망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동아일보를 통한 물산장려운동의 적극적 참여, 지역 면포상 조직의 적극적 활용 등 다양한 전략을 통해 수익 창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대안교과서는 또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공업이자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이라며 “그(경성방직)를 통해 양성된 인력은 광복 후 한국 면방직공업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경성방직이 한국 근대사에 차지하는 의미를 평가했다.

이 교과서는 인촌 선생을 사진과 함께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해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약했으며 1951년 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듬해 5월 사임했다”고 소개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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