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교과서 뒤집어읽기]지도의 정치학

  • 입력 2008년 1월 28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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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실제보다 커보이는 메르카토르 세계지도

냉전시대 왜 미국이 즐겨 썼을까

○ 생각의 시작

남북한이 한창 이념 대립을 벌이던 1960, 70년대. 반공(反共) 표어나 포스터를 그릴 때면 항상 북한은 붉게, 남한은 초록색이나 파란색으로 그렸다. 어렸을 때 이러한 그림을 보면 언제든지 북한이 쳐들어 올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남북한 화해무드가 형성되면서 이런 지도는 보기 힘들게 되었다. 최근에는 여러 운동 경기에서 남북한 공동팀이 출전하면 자연스럽게 관중은 파란색의 한반도 기를 흔들게 되었다. 같은 한반도를 그린 지도인데 어떤 때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어떤 때는 화합의 감정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누구나 지도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도, 우리나라 전도 등 다양한 지도를 보면서 지도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에는 친구들과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나 지명을 빨리 찾는 놀이를 한다. 그리고 이 놀이가 시들해질 즈음이면 어느 나라가 가장 큰지, 우리나라와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찾아보기도 한다. 누구나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는 러시아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러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임에는 틀림없지만 지도에서 보이는 만큼 큰 나라는 아니다. 그럼, 왜 이런 지도를 만들었을까?

○ 기존의 시각은?

먼저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지도의 개념과 지도가 갖는 한계점을 살펴보자.

지도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둥근 지구의 표면을 평면에 표현했다. 둘째, 실제의 공간보다 축소해서 그렸다. 셋째, 실제의 형상이 아닌 기호를 이용해서 표현하였다. 물론 지표 공간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한 장의 사진이나 간단한 스케치로도 표현할 수 있다. 나아가서는 항공 사진이나 인공위성 자료로도 지표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지도는 필요한 내용만을 추출해서 표현한다는 점, 공간 관계의 요소를 강조하여 표현한다는 점, 기호라는 비유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표현 수단과는 커다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지도는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사실 그대로를 나타낼 수 없다. 첫째, 지표면은 구(球)의 형태인 반면, 지도는 평면이다. 따라서 구를 평면으로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왜곡은 피할 수 없다. 둘째, 지도는 일정한 축척에 따라 지표를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지표 현상을 나타낼 수 없으며 선택된 정보만을 나타낸다. 셋째, 지도의 주된 사용 목적에 따라 강조해야 할 특정 현상들을 과장시켜 나타낼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 생략할 수도 있다.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

○ 무엇에 주의해야 할까?

교과서를 보면, 지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내용은 단지 교과서의 내용일 뿐이라 여기고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나가 버린다. 가장 정확해야 할 지도가 제작 초기부터 문제점을 안고 태어난 것이다. 지도는 한정된 종이 위에 표시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을 취사선택해야 할까? 여기에서 지도 제작자의 의도가 개입되는 것이다.

수많은 주요 흑인 거주지들, 특히 흑인 분리 거주지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에서는 무시되거나 최소화돼 있다. 이것은 흑인 거주지역들, 특히 불법 점유지들을 지도로 옮기기가 어려웠던 사정을 반영하고 있지만,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인구 조사 자료의 정확도가 인종 집단에 따라 달랐던 것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들이 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백인들에게만 주의가 집중됐다는 점이다. 그 결과 지도에서는 특히 농촌 지역의 소규모 백인 도시들이 실제보다 훨씬 더 두드러지게 표시됐다.[제러미 블랙, ‘지도, 권력의 얼굴’]

결국, 지도 제작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드느냐에 따라 지도의 모습도 달라진다. 어릴 적 우리가 접했던 대부분의 지도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들어진 지도였다. 이는 항해도로 제작된 것이지 국가 간 면적과 거리를 비교하는 지도는 아니었다. 이러한 지도의 제작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편의대로 지도를 해석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들을 몇 가지 더 보자.

○ 또 다른 생각은?

1898년에 고안된 반데르 그린텐(Van der Grinten) 투영법에서는 중위도와 고위도 지역을 과장해 표현하는 메르카토르 투영법의 방식이 계속된 결과 그린란드, 알래스카, 캐나다, 소련이 실제보다 크게 표시되었다. 이 투영법은 1922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지리학협회에서 사용했고, 그 영향력도 대단했다. 이 투영법에서는 소련이 마치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위협하는 거대하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그려졌다. 결국 이 투영법은 미소의 냉전 시대에 맞는 지도 이미지였던 셈이다. 지도라는 객관성의 이면에 이데올로기를 숨기는 솜씨가 실로 교묘하다.

1967년 페터스가 고안해낸 지도는 열대 지방을 엄청나게 키워놓았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길이가 극단적으로 과장됐다. 그러나 열대 지역을 강조한 이 지도는 제3세계에 대한 관심과 일치했고, 국제 구호 단체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제3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던 교황청이나 기독교 단체들로부터도 열띤 지지를 받았다. 또 페터스의 세계지도는 ‘남북관계: 생존을 위한 계획’이란 책에서 호평을 받으며 책의 표지에 실리기도 한다. 지도학 자체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고 서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필요로 했던 시대의 요구에 페터스의 지도가 정확하게 부응한 셈이다. 세계의 형상이 지도에 객관적으로 반영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정치적 관심이 지도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하겠다.[마크 먼모니어, ‘지도 전쟁’]

○ 결국!

이와 같이 지도 제작자들은 객관적인 눈을 가진 이들이 아니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였다. 지도가 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통념은 지도의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따라서 지도를 읽을 때에는 지도 속에 감춰진 다양한 맥락과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세계지도를 보면 태평양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중앙에 그린 경우가 많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은 변두리에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일까?

최유진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지도 제작에 관한 배경지식은 이지논술 홈페이지(easynonsul.com)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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