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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2월 1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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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easynonsul.com) 강의로 특집 편성한다. 각 대학 논술시험에 최근 빈번하게 출제되는 핵심 주제들을 한눈에 정리하고, 거기서 뽑아낸 인문·사회학적 개념을 통합교과적으로 적용해보는 마지막 도상연습을 해보자.》
■ 최신 출제 주제
① 의사소통의 도구,언어가 가진 한계
일상에서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 있어 한계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이 같은 한계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언어 내적 한계와 언어 사용 환경을 둘러싼 언어 외적 한계가 그것이다. 차례로 살펴보자.
▨ 언어 내적 한계
언어학자인 페르디랑 드 소쉬르는 언어를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하여 음성적 기호(청각영상과 개념이 결합되어 있는 기호)를 사용할 때, 감각으로 지각되는 소리의 면을 시니피앙이라 하고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뜻의 면을 시니피에라 한다.
이들 둘은 상호전제의 관계이며 그 결합은 내적 필연성 없이 언어공동체의 관습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를 ‘언어 기호의 자의성’이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개’라고 부르는 동물을 미국에서는 ‘dog’, 일본에서는 犬(いぬ·이누)라고 하는 것은 언어 기호의 자의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 사용하는 것은 시니피앙이다. 하지만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는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이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가 갖고 있는 내적 한계(언어 자체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 자체의 한계는 동서고금 많이 다루어져 왔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들이 우리 자신의 절실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낼 수 없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한다. 예컨대 소중한 사람과 이별을 했을 때 ‘나는 슬프다’는 언어(시니피앙)는 결코 그 순간 내가 느끼는 절실한 슬픈 감정(시니피에)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언어가 결코 뜻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뜻의 ‘언불진의(言不盡意)’의 사상은 특히 동양철학에서 많이 주목받아 왔다. 서구에서도 이런 의식은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왔다. 소크라테스는 언어, 특히 문자는 사실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후대에 자신의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비록 저작을 남겼지만 문자를 파르마콘(pharmacon·약인 동시에 독)에 비유하면서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언어 외적 한계
이러한 언어 자체의 내적 한계 이외에 일상에서 의사소통을 왜곡하는 언어외적 한계도 존재한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평등한 인간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계적 권력관계에서도 많이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서의 위계적인 권력관계라고 하는 것은 외적 지위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개인이 갖고 있는 지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위계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는 군대에서 장군은 사병에게 자신의 의사를 마음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반면, 사병은 장군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 등을 마음대로 전달할 수 없다. 이것이 외적 지위에 의한 언어 외적 한계를 보여 주는 의사소통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의사소통의 한계란, 의사와 환자의 예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사와 그렇지 못한 환자가 의학적 문제에 대해 대화할 경우 이 대화는 상호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아닌 의사의 일방적인 강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지식의 소유가 인간 상호 간의 대화에 있어서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는 의사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진정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의사소통적 이성’은 어떤 규범적 내용을 가져야 할까? 도구적 행위나 전략적 행위에서의 이성은 외부의 자연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의 뜻대로 따르게 하는 것, 즉 타자를 동화 혹은 동일화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위에서 맺어지는 타자와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지배관계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진정한 의사소통은 ‘서로 다른 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다. 의사소통은 ‘다른 자’와의 교섭이고 또 오직 ‘다른 자’와의 관계에서만 의사소통이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관계된 자들 사이의 ‘거리’와 ‘차이’는 의사소통의 전제이자 본질적 계기이다. 이 전제가 없을 경우 의사소통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2008 경희대 2차 예시문항]
② 가상공간과 자아정체성
인터넷의 발달은 공간에 대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사이버 스페이스(가상공간)’라는 새로운 공간과 ‘접속’이라는 새로운 존재의 양식이 그것이다.
‘접속’은 현실의 ‘나’에서 익명의 ‘나’로, 내부에 있던 욕망을 가상공간의 곳곳에 쏟아낼 ‘다른 나’의 연쇄적인 창조로 이어진다. 그리고 접속의 공간이 늘어날수록 가상공간에서의 ‘나’는 지속적인 분열을 거듭하게 된다. 따라서 분열된 수많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의문이 남는다. 각각의 스토리지(데이터 저장소)에 남아 있는 ‘나’는 과연 ‘나’인가?
가상의 문화에서, 인터넷에서의 경험은 그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사이버공간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고, 생각을 교환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창조물로서 인물을 가정할 수 있다. 스타트랙에서 영감을 받은 컴퓨터게임을 하면서,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은 일주일에 80시간을 은하계 우주탐험과 전쟁에 참여하면서 보낸다. 그들은 낭만적인 용사, 직업을 갖고 급료를 받으며 예식과 축제에 참여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도 하는 캐릭터를 창조한다. 여성의 역할을 하는 남성은 “이것은 나의 삶보다 더 실재 같다”라고 말한다. (…) 실제로 인터넷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사고방식, 성별, 공동체의 형태, 정체성을 변경시키는 새로운 공간에서 접속하게 한다. [2004 고려대 수시 2]
‘나’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갖기 힘들다. 게다가 자투리 시간은 또 다른 접속을 위한 기회로 이용하기도 한다.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새삼스럽지 않다. 접속이 존재의 방식이 되면서 현실과 가상공간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무수히 연결된 관계망에 있는 하나의 접속점처럼 행동하는 새로운 개인, 이른바 ‘변화무쌍한 인간’이다. ‘나’는 더 이상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네트워크의 모니터로서 존재할 뿐이다.
인쇄기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놓았던 것처럼 컴퓨터는 앞으로 두 세기 동안 인간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이른바 ‘닷컴’ 세대에 속하는 젊은이들의 정신 발달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벌써 주목하고 있다. 컴퓨터 화면 앞에서 자라면서 많은 시간을 채팅과 전자오락에 쏟아 붓는, 아직은 소수이지만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젊은이들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다중 인격자’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특정한 시간에 자신이 몸담았던 가상 세계나 네트워크와 어울리기 위해 이용했던 짧은 토막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2007 서강대 수시 1]
그리고 가상공간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나’는 현실의 ‘나’와 접속을 통해 대면한다. 대면한 ‘또 다른 나’에게 묻고 싶다. “누구냐. 넌?”…“I…are(!) Personas.”
‘페르소나(persona)’는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이는, 혹은 보여 주기 원하는 나의 다른 모습으로 ‘인격의 가면’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도 여러 가지의 페르소나를 갖고 살 수 있으나 실명으로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 윤리와 이성에 의해 욕망은 대부분 억눌려 있다. 그러나 가상공간에서는 익명의 가면(아바타, 아이디 등)을 쓸 수 있고 금기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기에 욕망은 끝없이 분출되고 그 과정에서 자아는 끝없이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 자아의 통일성 붕괴― 은 곧 자아의 해체이며 자기 속에 억압되어 있던 수많은 ‘나’를 가상공간에 커밍아웃하는 계기가 된다. 무한의 공간에서 이러한 ‘사이버 페르소나’는 다양한 관계를 양산하고 수많은 ‘가상공간’을 건설한다.
현실의 공동체가 공간적인 제약과 우연에 의해 규정되고 강제되는 반면, 가상공간은 개인의 이해와 욕망에 따라 조직되고 존속되고 선택되는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다. 그런데 익명성과 수많은 페르소나의 존재가 가상공간의 조직과 존속을 느슨하게 만들고, 결국은 현실에서의 소통까지 저해하여 현실 공동체의 내밀함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이 있다. 게다가 가상공간에 접속하는 시간이 날로 증가함에 따라 현실 공동체를 통하여 사회적 관계를 맺고 소통의 내연을 넓혀야 할 시간은 절로 줄어들어 내밀함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한 걸까?
우리가 접하는 가상공간에서의 수많은 사이버 페르소나는 다름 아닌 개인들의 다양한 모습들, 다시 말해 현실세계에서의 직간접적인 경험의 내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익명성은 현실의 지위나 위계로부터 벗어나 타자와 자유롭게 소통하게끔 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질들이 현실에 이어진다면 현실 문제의 판단과 선택에서 적극성과 유연성은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연한 자아’의 형성은 결국 타자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게 되어 현실 공동체에서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을 오히려 높여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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