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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21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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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에 논술시험을 적용한 취지는 정규 과목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창의적인 지식과 교양 교육을 배양하자는 것이다. 지난해 서울대가 입시에서 논술의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한 이유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낮은 변별력을 보완하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통해 청소년의 창의력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논술은 다른 과목과 달리 학생 스스로의 지적인 독서나 논리적 사고 훈련 없이는 결코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없다. 논술의 경우 서울 강남의 유명 학원도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듯하다. 학원은 논술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기계적인 방법은 가르쳐 줄지 모르지만, 주어진 논제를 창의적이고 아름답게 풀어내어 표현하는 방법은 결코 가르치지 못한다. 올해 서울대 입학생 중 강남의 학원에서 교육받은 수험생보다 지방 출신 학생이 논술에서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점이 이런 사실을 증명해 준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문필가와 학자가 한결같이 느끼듯, 훌륭한 논술을 쓸 수 있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논술 능력은 오랜 시간에 걸친 치열한 독서와 폭넓은 관찰, 그리고 견문을 통해 유기적으로 얻어진 지적인 산물이다.
실제로 훌륭한 글은 글쓴이가 독서를 통해 쌓아 올린 교양과 지식이 새로운 글쓰기의 동기와 자극을 통해 나타난 의식적인 반응이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쓴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어떤 학생이 논술 사교육 덕분에 운 좋게 조금 높은 점수를 받아 입시관문을 통과했다 해도 대학에서 훌륭한 학습능력을 보여 주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논술 교육의 현장이 이렇게 불행한 방향으로 나간다면 창의적인 지식교육의 기반을 닦기 위해 힘겹게 마련한 논술 교육이 머지않아 폐기 처분될 운명을 맞게 될지 모른다. 내년부터 입시에서 논술의 비중을 낮추겠다고 발표한 고려대의 결정도 비정상적인 논술 광풍의 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경계한 이유 때문일 게다.
서민 가계에 엄청난 부담이 되는 논술의 근본적인 대책은 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임기응변적인 사교육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지속적인 독서와 글쓰기 연습을 하는 데서 마련돼야 한다. 고전을 읽는 습관이 글쓰기에 소중한 이유는 깨달음의 지평을 넓혀주는 풍부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있다. 짧은 시간 속에서 인간이 삶에서 얻는 경험은 제한되지만 책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겹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을 누린다.
글쓰기도 일기와 같은 간단한 연습에서 시작해 고전이나 역사에 나타난 문제를 풀어가는 논리적 훈련으로 시간을 두고 발전해 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독서 연령이 높아지면 그만큼 사물을 조감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향상되므로 높은 수준의 글을 쓸 수 있다. 프랑스의 대학 입시에서 철학에 관한 에세이 문제가 출제되고, 미국 하버드대가 졸업논문(senior essay)을 필수로 제도화한 이유도 이런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정치 분야에서 낙후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민도(民度)와 함수관계가 있는 교양교육의 빈곤 때문이 아닐까.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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