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과학 돋보기]‘자연주권’을 아십니까?

  • 입력 2006년 11월 21일 02시 56분


세렝게티 국립공원. 영화 ‘말아톤’에서 자폐아 초원이가 몽매에도 그리던 자유의 땅이 바로 세렝게티다. 아프리카 말로 ‘거대한 초원’이란 뜻을 가진 세렝게티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케냐에 걸쳐 펼쳐져 있다. 사자 코끼리 얼룩말 등 약 300만 마리의 대형 포유류가 살고 있는 이곳은 사실 초원이가 뛰어다니기엔 너무 넓다. 1981년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가 세렝게티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이곳이 지구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앞으로 먹고 살 소중한 자원이라는 판단에서다.

아버지가 물려준 아파트만이 유산이 아니다. ‘자연유산’이라는 더 귀중한 유산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지낸다. 자연유산이 왜 중요할까?

다국적 제약회사인 로슈의 경우를 보자. 로슈는 중국의 자생식물인 스타아니스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타미플루라는 이름의 약품을 개발했다. 바로 세계보건기구(WHO)가 유일하게 공인한 조류인플루엔자(AI) 치료제. 개당 가격이 5만∼6만 원인데, 앞으로 10년 동안 세계 인구의 20%가량이 복용할 만큼의 양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수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지구 생명자원을 보전하기 위해 활동하는 국제기구들이 많다. 특히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는 ‘생물다양성협약’이란 것을 채택하고 세계 각국의 생명자원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최근에는 신약 특허를 낼 때 약의 원료 원산지를 명기하는 문제를 놓고 나라들 간에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신약에 대한 특허를 출원할 때 약의 원료가 된 생명자원의 산지를 함께 등록함으로써 산지 사람들에게 신약 개발의 이익이 일부 돌아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풍부한 생명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후진국들은 찬성하지만, 기술력이 앞선 선진국들은 반대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생명자원을 확보하고 발굴하기 위해서도 생물학 연구가 필수적이다. 생물학은 생물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생물 연구는 A라는 생물과 B라는 생물이 어떻게 다른지를 연구하는 ‘분류학’에서 출발한다.

좀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대적 식물분류학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촉탁교수로 있었던 나카이 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의해 식물이 체계적으로 수집, 연구되었던 것이다. 사실, 나카이 박사가 우리 식물을 연구한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자원을 수탈해 가기 위한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다.

그래서인지 당혹스러운 일들도 벌어진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생명자원을 연구했던 외국 학자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도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고, 연구결과를 학계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의 자원을 자기 나라 공인기관에 연구 증거물로 제출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세계 최초로 학계에 보고 되었던 우리나라 자생생물의 증거물(이를 전문용어로는 ‘모식/기준표본·holotype’이라고 부른다) 중 대부분이 외국의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웃지 못 할 일도 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만 가보아도 우리나라의 특산종인 물고기나 야생동물의 증거표본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허탈한 일도 있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 층층이 매끈하게 깎인 매력적인 모양의 성탄목(聖誕木)은 사실 우리나라 나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자생종인 구상나무를 미국인들이 가져가 크리스마스트리로 개량한 것이다.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미스킴 라일락’도 사실은 ‘수수꽃다리’라는 우리나라 자생종을 서양인들이 가져가 개량한 것이다. 라일락에는 대체로 여자 이름을 붙이는데, 한국 여성들 중에 ‘김(Kim)’ 씨가 특히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서글픈 사연을 가진 꽃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소비자주권 시대’란 말들을 한다. 그만큼 소비자의 권리가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생명자원에 대한 권리를 지키는 일은 그보다 수천 수만 배 더 중요한 일일지 모른다. ‘자연주권’ 말이다.

김창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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