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아이비리그의 여성 총장들

  • 입력 2006년 2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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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비리그 8개 대학 가운데 3개 대학의 총장이 여성인 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느낌을 준다. 프린스턴대의 셜리 틸먼 총장과 펜실베이니아대의 에이미 거트먼 총장, 브라운대의 루스 시먼스 총장이 그들이다.

펜실베이니아대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재임한 주디스 로딘 전 총장에 이어 여성이 12년간 대학을 이끌고 있다. 브라운대의 시먼스 총장은 가난한 흑인 소작농의 딸이다. 아이비리그 대학은 아니지만 명문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역시 여성인 수전 호크필드 총장이 지난해 취임했다.

대학 총장 자리는 이제 존경받는 노(老)학자들이 오르는 명예직이 아니다. 외부 지원금을 많이 끌어 오고 내부 혁신을 주도하려면 경영 마인드가 필수적이다. 세계 대학 랭킹에서 최상위에 올라 있는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보수적 색채가 강한 곳이다. 이런 대학들이 여성을 총장으로 뽑는 것은 남녀 구분을 떠나 경영 능력을 높이 산 결과다.

한국에선 여성 총장이 선출될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예외적으로 여자대학들이 여성 총장을 임명하고 있고 여성 설립자가 직접 총장을 맡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에서 여성 총장이 나오기 어려운 것은 여교수 수가 워낙 적기 때문이다.

전국 4년제 대학의 여교수 비율은 평균 16%에 불과하고 국립대는 10%를 겨우 넘고 있다. 예컨대 서울대는 10%, 연세대는 12%, 고려대는 9%에 머물고 있다. 총장을 보좌하는 보직교수에도 여성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나중에라도 총장이 나오려면 여성 교수들이 대학행정 경험을 미리 쌓는 게 중요한데 자의든 타의든 여기서도 배제돼 있는 실정이다.

여성 총장의 문제를 떠나 교수 사회의 남성 편중은 전체 대학생의 40%가량을 차지하는 여학생 교육과 활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학생들은 대학 내에서 자신의 ‘역할 모델’을 찾기 어렵고 교수와 상담이 필요할 때도 여교수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수들은 “여학생이 늘어나면 그만큼 대학 정원이 줄어드는 것”이라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여자 졸업생은 사회 진출이 부진한 반면 남자 졸업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여학생이 선호하는 대학일수록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최근 각종 국가고시와 교직에 여성 진출이 부쩍 늘어나자 ‘여고(女高) 남저(男低)’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고등학교의 내신 평가에서도 여학생들이 상위를 독점한다. 그러나 대학 입학생 수에서 남학생은 여전히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여학생은 40%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고시에서 여성의 합격 비율은 대략 30%를 웃도는 수준으로 대학의 여학생 비율과 거의 일치한다. 이처럼 여학생의 ‘약진’은 아직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일 뿐이다.

어느 대학에서 교수 채용을 심사하는 교수들이 여성 지원자의 탈락 이유를 써넣는 항목에다 ‘여성이기 때문’이라고 기재했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도 있다. 대학들이 여성 인력의 육성과 활용에 별로 관심이 없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저출산 시대를 맞아 고급 여성 인력을 사장(死藏)시키면 국가경쟁력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

미국 대학들이 여성 총장을 많이 기용하는 것은 파벌에 휩쓸리지 않고 원칙대로 학교를 운영해 나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작 부러운 것은 여성 총장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는 자유롭고 유연한 내부 분위기다. 학교를 잘 키울 수 있는 적임자를 실력 본위로 뽑는 미국 대학의 풍토는 경직되고 폐쇄적인 한국 대학과 대비된다.

한국 대학들은 구조조정의 노하우 이전에 이런 실력 제일주의와 자유로운 정신을 먼저 배워야 한다.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는 길도 실은 이 안에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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