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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6월 1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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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 한국학 연구자인 카터 에커트(60)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석좌교수는 지난달 30일 본보와 회견을 갖고 대외관계 재정립과 과거사 재평가를 둘러싼 한국 내의 대립에 관해 자신의 분석과 해법을 거침없이 제시했다. 에커트 교수는 김구 아카데미(원장 최연 홍익대 교수) 주최로 지난달 25∼31일 열린 ‘21세기 한국을 위한 리더십과 비전’ 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했다.
―최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제기한 ‘동북아 균형자론’을 놓고 논란이 적지 않다. 한국이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대내외적 여건은 마련됐다고 보나.
“신라와 조선시대 초기 한국은 군사력과 함께 외부세계에 참여하려는 욕구, 교류를 통해 외부세력으로부터 배우려는 충만한 의지 등에 힘입어 균형기를 이룬 때가 있었다. 현재 한국은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정치적으로 민주적이며 안정적이어서 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시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고 국내적으로 보수-진보 간에, 또한 세대 간에, 그리고 미국에 대한 정책을 놓고 두 갈래 시각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같은 인식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선 한국은 경제도 발전했고 더 이상 1950, 60년대처럼 미국에만 의존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한국과 미국이 서로 인식해야 한다. 한미는 접근방법이 서로 다르다 해도 1945년부터 지속돼 온 인적 교류와 동북아 평화 및 한반도 비핵화라는 공통목표를 바탕으로 서로 이해하고 상호존중을 해나감으로써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 내부의 ‘남남(南南)갈등’은 민주적 시스템에 의해 해결돼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 새로운 정권은 흔히 상대편에 대해 일방적으로 정책을 선언하고 나오는데 충분히 언론을 통해 설득하고 정치인들 간에 토론하여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은 이를 실현하는 방식에서 반대세력에 대해 합의가 아닌 일방적 선언만 해버리는 바람에 논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적과 광복 이후 의혹 사건들에 대해 한시적으로 법에 의한 기구를 구성해 조사하는 한국의 과거사 청산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친일문제는 너무 복잡한 문제다. 친일파라는 정의조차 쉽지 않은 문제다. 직책이 아니라 개인이 놓여 있던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더욱이 역사는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져야 한다. 시간을 갖고 문헌에 의해 객관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가들이다. 역사를 정치화하는 순간 문제의 복잡성이 사라지고 단지 정치의 도구로 사용될 위험성이 있다. 보다 진지하고 열린 조사가 어려워진다. 단순히 친일이다 아니다 하면 문제의 복잡성이 사라진다. 나는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일제강점기 동아일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동아일보가 당시 한국 사람들의 의견과 생활에 대한 살아있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박정희(朴正熙) 시대를 다룬 ‘한국 근대화, 기적의 과정’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박정희 시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발전적으로 넘어서기 위한 접근법은 무엇이라고 보나.
“박정희 정권이 좋은 것이었느냐 나쁜 것이었느냐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질문이다. 나는 역사학자로서 박정희가 왜 그런 인물이 됐고, 왜 5·16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왜 그런 정책을 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박정희 시대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혁기였다. 이 시기에 정부 쪽에 있던 사람이나 반정부 쪽에 있던 사람들의 경험을 후대가 볼 수 있게 문서보관소(archive) 방식으로 자료를 보존해야 한다. 빈곤 극복과 민주화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문서로 정리돼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를 위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는데 정치적 이유로 중단된 것 같다.”
▼카터 에커트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 석사(1968년), 워싱턴대 박사(1986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서 활동(1969∼77년)
△하버드대에서 한국현대사 강의(1985년∼)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장(1993∼2004년)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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