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암살 실행조 이모씨와 가진 일문일답 요약

  • 입력 2005년 4월 11일 15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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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사시저널’이 김형욱 암살 실행조 이모씨와 가진 일문일답 요약.

파리에서 김형욱을 처음 어떻게 만났는가?

우리는 암살 실행조였고, 유인조는 따로 있었다. 한국 여배우가 현장에 있었다. 김형욱이 미국에서 단신으로 파리로 온 것은 그 여배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형욱은 어떤 자세였는가?

1979년 10월7일 밤 우리 두 사람은 파리 시내 한 카지노에 딸린 레스토랑으로 갔다. 안내원은 그곳이 김형욱과 여배우가 만나기로 한 장소라고 했다. 우리는 여자 일행이 탄 차가 대기하는 순간 모셔다 드리겠다며 기다리라고 한 뒤 카지노에서 나와 막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려는 김형욱 앞에 서서 ‘밖에 여자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안내했다. 김형욱은 약간 술이 올라 있었다. 여배우가 타고 있던 캐딜락 문을 열자마자 ‘저희가 모시겠습니다’하면서 팔을 잡고 부축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동시에 즉시 코에 마취제를 스쳤다. 타고 있던 여배우 일행에게는 ‘많이 취하셨으니 오늘은 저희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차에서 내리도록 했다.

김형욱씨를 납치해 어디로 갔나?

안내원이 운전을 하고, 나와 후배는 뒷좌석에서 의식을 반쯤 잃은 김형욱의 양옆에 앉아 미리 답사해둔 파리시 북서쪽 외곽의 한 양계장으로 차를 몰았다. 시내에서 4~5km정도 떨어져 있는 한적한 농가 양계장이었다.

왜 암살 장소로 양계장을 택했나?

프랑스 정보기관은 세계 제2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소수 정예 조직이다. 그런 기관에 발각되지 않고 완전 무결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암살이야 어떤 방법으로든 할 수 있지만 흔적을 남기면 국가가 곤란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경찰과 정보 당국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방법을 찾다가 양계장 분쇄기를 택했다.

양계장에서 어떻게 처리했나?

낮에 양계장을 답사해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 양계장은 노인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고 근처에 인가가 드물었다. 대신 사나운 개들이 있었다. 낮에 이곳을 찾아 개들이 우리를 알아보게 하는 조처를 취했다. 우리가 받은 훈련 중에는 개에게 짖지 않도록 조처하는 기술이 있었으므로 그건 어렵지 않다. 양계장 문을 열고 들어가 사료분쇄기 작동 버튼을 눌렀다. 사료분쇄기는 대형 믹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분쇄기 입구는 계단 3개 정도 밟고 올라가야 했다.

김형욱씨는 당시 어떤 상태였나?

가벼운 수준의 마취를 했기 때문에 양계장에 도착할 때까지 어리어리한 상태였다. 급소를 잡고 들쳐 멘 채 분쇄기 계단 위로 올라갔다. 살은 좀 쪘지만 키가 그리 크지 않아서 무겁지는 않았다. 머리부터 분쇄기에 집어넣었다. 잠깐 동안 흔적도 없이 분쇄되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닭에게 공급되었다.

당시 김형욱씨와 눈을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눈 사실이 있는가?

우리는 교수대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의 심정으로 그를 분쇄기에 처리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는 사라져 줘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다른 감상이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유명을 달리하는 자에게 가장 고통이 적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우리 세계의 철칙에 따라 머리부터 집어넣어 부순 것이다. 그는 마취된 상태여서 말을 안했다.

한순간에 그렇게 납치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김형욱 제거는 우리 팀이 이미 1년 전부터 준비했다. 1978년 11월부터 일본을 경유해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본부를 둔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되어 특수 훈련을 받았다. 암살 현장답사와 실행 지휘는 내가 담당했다. 프랑스는 김형욱이 자주 오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보기관의 눈에 들키지 않고 완전무결하게 처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래서 준비 작업을 많이 했다.

김형욱을 분쇄기에 넣은 뒤 행로는?

다른 안내 차량을 타고 남부 국경으로 달려 피레네 산맥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스페인 남부 영국령인 지브롤터 항구까지 찻길로 거의 1주일 가까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초 계획대로 침투할 때 탔던 화물선이 안트베르펜 항에서 하이파로 돌아오는 길에 지브롤터 항구를 경유하는데, 그곳에서 귀환하는 화물선을 타고 처음 출발한 이스라엘 북부 항구 하이파로 들어갔다. 이스라엘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며칠 쉰 뒤 귀국했다.

공작에 실패할 경우 대비책도 있었을텐데...

프랑스 정보기관에 발각되면 국가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대한민국과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어야 했다. 일이 잘못돼 붙잡힐 경우 현장에서 자결할 생각이었다. 또 발각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는 안내원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둘만 동양인 등산객으로 위장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쪽으로 도보 탈출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일각에서는 김형욱이 서울로 납치되어 와 차지철에게 살해됐다고 주장하는데...

프랑스 정보기관과 경찰을 우습게 아는 상상일 뿐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해상과 육상 침투를 했고,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공으로 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 체크가 되기 마련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윤일균 차장에게 직접 전화해서 김형욱 회고록 저지 공작을 지시한 것을 보면, 제거 공작도 결국은 박대통령이 지시한 것 아닌가?

그런 거는 묻지 말라. 박대통령이 ‘그놈 못쓰겠더라’고 하면 밑에 사람은 당연히 ‘각하 안심하십시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하는 것이 원칙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김형욱 사건은 중정에 기록이 없다.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가 지시하고 의논하고 보고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와 프랑스에 가서 옛 양계장 자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답사까지 했으므로 파리 서북쪽 외곽으로 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당시 영감 한명과 개 몇 마리가 있었던 양계장이었다. 내가 연구한 방법 중에 양계장 분쇄기 처리가 가장 안전했다.

중정 소속 특수요원이었으므로 김재규 부장이 파견한 것 아닌가?

아니다. 나를 담당하던 중정 윗선에서도 내가 파리에 침투하는 것을 몰랐다.

파리로 가기 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박대통령을 만났는가?

1979년 초 밤에 불려갔는데 청와대 별관으로 알고 있다. 경호하는 분들이 옆에 있었지만 나는 대통령 말씀을 듣느라 긴장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술을 따라 주셨다. 그것뿐이었다.

박대통령이 술잔을 따르며 김형욱을 제거하라고 하던가?

절대 그런 말씀 없었다. 그냥 나쁜 놈이로구나 이렇게 말씀했을 뿐... ‘나쁜 놈이로구나, 내가 믿었던 김형욱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 하며 통탄을 하시는데……(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더 말이 필요한가? 박대통령이 나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비밀인데… 옛날부터 국가 원수가 비선 간첩 내놓고 만나고 총애해 주는 일 봤는가. 절대 그런 것은 드러내면 안된다.

조국을 짝사랑했다고 주장하는데, 이제 나라에서 책임 있는 대답을 해줘야 할것 같다

조국은 내게 영원한 짝사랑 대상이다. 정보총책임자인 김형욱이 함부로 떠드는 것을 막아야 했다. 국가의 정보 총책임자가 함부로 정보를 누출하고 그 정보를 돈을 주고 팔겠다고 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 인간은 제거해야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국가를 짝사랑은 하지만 믿지는 않는다. 내가 스페인 반도를 통해 파리로 들어가지 않고 그 먼 길을 돌아간 것도 조국을 보호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김형욱씨를 제거한 데 대한 지금 심정은 어떤가?

그 일은 대의 명분을 세워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교도관이 사형수를 처형해도 기분이 불쾌한 일인데, 인간을 그렇게 처리한 내 기분이 좋았겠는가. 언젠가 내가 조사받으며 진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파리로 떠날 때 나는 후배에게 우리의 행위가 종교적으로 돌아보아 떳떳한가, 김형욱의 가족 앞에 떳떳한가를 생각하고 나서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지금 김형욱씨 가족이 살아있는데 왜 기자는 나에게 이런 말까지 모두 하게 만드는가?

이 모든 사실을 다 국정원의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 나가 밝힐 의향은 없는가?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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