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코리아]제1부 이것만 고칩시다<4>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 입력 2005년 1월 21일 17시 56분


#사례1 : 주부 홍모 씨(56·여)는 지난해 말에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시댁에 들렀다가 밤늦게 자신의 승용차로 귀가하던 홍 씨는 서울 은평구 역촌동 사거리에서 빨강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다. 이때 바싹 붙어 따라오던 차량이 급정거하며 홍씨의 차량을 들이받았다. 안전거리를 유지하지 않은 상대방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뒤 차량의 덩치 큰 운전자는 차에서 나오자마자 성난 표정으로 대뜸 “사람도 안 지나가는데 갑자기 서면 어떡해, 집에서 밥이나 할 것이지”라며 소리를 질렀다.

#사례2 : 회사원 김모 씨(27)는 최근 서울 남부순환도로에서 차로 변경을 시도하던 중 옆 차로에 있던 회사원 박모 씨(36)의 승용차와 추돌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경미한 사고였다. 실수했다고 생각한 김 씨는 사과하려고 했지만 박 씨는 도로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삿대질을 하며 “갑자기 차로 변경을 하면 어떡하냐”며 소리부터 질렀다. 김 씨도 이에 맞서 언성을 높였다. 결국 욕설이 오가며 몸싸움이 벌어졌고 김 씨의 윗옷 일부가 찢어지기도 했다. 싸움은 경찰이 와서야 진정됐다.

“교통사고가 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한국식’ 속설이 있다.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운전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상대방이 괜찮은지를 묻기보다는 서로 제 잘못이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교통문화운동본부 박용훈(朴用薰) 대표는 “국민의 기본적 인식이 자신이 가해자일지라도 크게 목소리를 내고 우기면 뭔가 승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그런 심리적 요인 때문에 일단 남을 억누르고 우기려는 습관이 길러진다”고 말했다.

하루 5시간 이상 운전한다는 영업사원 박모 씨(32)는 “처음에는 사고가 났을 때 상대방을 배려했지만 결국 나만 손해인 경우가 많아 태도를 바꾸게 됐다”며 “내 잘못을 인정하면 괜히 손해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처음부터 우기게 된다”고 말했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국내 자동차 총 등록대수는 1493만4088대. 자동차 보유 대수 면에서는 세계 10위 수준이다.

또 도로 등 교통환경 역시 이미 선진국 수준에 올라와 있지만 여전히 교통사고 발생이 잦고, 또 교통문화에 대한 시민의식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에 따르면 2002년 말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자동차 1만 대당 교통사고 발생 건수가 우리나라가 가장 많다. 일본 캐나다 미국 오스트리아 영국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발생 건수는 일본 미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다음으로 많다. 자동차 보유 대수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선진 교통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보완도 중요하지만 시민의식 전환을 통해 교통문화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통문화운동시민연합 주영곤(周永坤) 대표는 “교통사고에 대한 시민들의 분쟁을 줄이기 위해 우선 교통경찰관의 사고수습능력과 교통사고관리시스템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 대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양보하며, 사고가 나더라도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는 생각을 버리고 ‘서로 한발씩 물러서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시민의식을 갖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한국유학생 사고경험기▼

정종한 씨(49)는 6년 전 프랑스 파리 유학시절 겪은 교통사고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차를 몰고 언덕길을 내려가다 오른쪽 골목에서 나오는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들이받고 말았다. ‘한국식’으로 미리 선수를 쳐야겠다는 생각에 차에서 내려 상대방에게 “운전을 그런 식으로 하느냐”며 벌컥 화부터 냈다.

그러나 상대편 차에서 내린 프랑스인 할머니는 싱긋 웃으며 보험증의 겉장을 보여줬다. 증서에 새겨진 글귀는 ‘화내지 마세요’였다. 순간 민망해진 정 씨에게 할머니는 “다친 곳은 없느냐”며 “보험사가 처리해 줄 것이니 화낼 필요가 없다”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관광차 방한한 미국인 아멘다 해스팅스 씨(22·여)는 지난해 미국에서 좌회전을 하다 반대편에서 오던 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으나 뒷수습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해스팅스 씨는 “일단 서로 괜찮은지를 물은 뒤 바로 구급차를 부르고 서로의 이름과 보험사 전화번호를 교환했다”며 “불필요한 언쟁은 오히려 분쟁의 소지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장일준 박사는 “한국의 교통문화가 아직 선진 수준에 이르지 못한 데에는 어렸을 때부터 교통문화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독일항공사 승무원이자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둔 독일인 나탈리아 발레즈 씨(36·여)는 “독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교통문화 관련 수업을 필수적으로 한다”며 “특히 한 학기에 3번 이상 교통담당 경찰관이 직접 학교를 방문해 아이들에게 생생한 교육을 시킨다”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동아일보 대학생 인턴기자 안현정(이화여대 국제학부 3년) 우정한(고려대 경제학과 3년) 안병찬 씨(연세대 경영학과 3년)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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