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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0월 20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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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9시30분 서울중앙지법 321호 즉결심판(즉심) 법정.
3명의 중년 남성이 나란히 피고인석에 섰다. 동네에서 판돈 10만원을 놓고 속칭 ‘훌라’라는 내기도박을 하다 즉심에 넘겨진 사람들. 판사는 한달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그중 박모씨가 “80만∼90만원쯤 된다”고 대답하자 판사는 “월수입에 비해 판돈이 10만원이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박씨 등은 별 대답을 못했다. 이들은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앞으론 이런 풍경을 보기가 힘들게 됐다. 즉심제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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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심과 그 역사=즉심은 범죄의 증거가 명백하고 비교적 죄질이 경미한 형사사건(20만원 이하 벌금, 구류, 과료)에 대해 판사가 경찰서장의 청구에 의해 정식 재판절차 없이 심판하는 절차를 말한다.
번거로운 정식 재판절차 없이 가벼운 범죄에 대해 신속한 처리를 하도록 한다는 취지여서 일면 긍정적 측면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즉심제도의 뿌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이 조선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 중 하나다.
광복 후 미 군정이 들어서면서 이 즉결처분제도는 곧바로 폐지됐다. 그러나 형사사건 처리를 위한 전문인력 부족으로 경찰서에 치안판사를 배치해 경미한 범죄를 처리하도록 하는 편법이 동원됐다.
이후 이 치안판사제도는 ‘순회(巡廻)판사’제도로 바뀌었고, 마침내 1957년 즉결사건을 다루는 순회판사제도를 명문화한 ‘즉결심판절차법’이 제정돼 오늘에 이르렀다.
▽즉심 법정의 변화=1970, 80년대까지만 해도 길에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침을 뱉은 경우가 주종을 이뤘으나 1990년대 이후엔 자가 운전자 증가와 함께 도로교통법 위반자가 태반이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경찰서 유치장에 ‘보호조치’를 할 수 있어 즉심이 갖는 위력이 상당했다는 게 법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1996년을 기점으로 즉심의 위력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게 경찰과 법원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전언이다. 헌법재판소가 “일선 경찰서의 관행인 즉심 대상자의 보호실 유치는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밝힌 것.
이후 즉심 대상자들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경찰이 보호조치를 할 수 없게 됐고 다음날 즉심재판이 열려도 대부분 법정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불출석상태에서 재판이 가능해 굳이 억울함을 호소할 생각이 없다면 범칙금 등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특히 2002년까지 연평균 80만건을 상회했던 즉심 건수는 도로교통법이 개정되면서 지난해 10분의 1 이하로 급감했다. 과거에는 교통범칙금 미납시 곧바로 즉심에 회부됐으나 법 개정으로 범칙금의 1.5배를 납부하면 되도록 하면서 굳이 법정에 나오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즉심 건수가 급감했지만 경제난을 반영한 듯 올해 들어선 상대적으로 전단지 배포, 불법 노점이나 포장마차 운영 등 ‘생계형’ 범죄자 비율이 높아졌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경찰의 단속에 불복, 이의신청을 통해 직접 단속 경찰과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경우도 잦다고 한다. 즉심 법정에서 만난 한 경찰은 “사실 즉심제도의 의미가 없어진 지는 오래됐다”고 말했다.
조용우기자 woogija@donga.com
▼징역 1년이하 범죄, 조사-판결-집행 속전속결▼
A씨는 난생 처음 음주운전을 하다 경찰단속에 걸려 면허취소 판정을 받았다.
A씨는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귀가했다. 경찰은 검찰의 지휘를 받아 2, 3일 내에 사건을 검찰로 넘긴다. 검찰(약식기소 등)과 법원의 판단을 거치게 되고 A씨는 사건 발생 몇 달이 지나서야 벌금고지서를 받게 된다. 기소와 재판, 벌금납부까지 몇 달씩 걸리는 것.
그러나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추진 중인 경죄(輕罪·가벼운 죄) 재판절차가 도입될 경우 A씨는 조사부터 벌금납부까지 며칠 안에 마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경죄 재판절차 도입은 ‘가벼운 사건을 질질 끌지 말자’란 취지에서 논의됐다.
▽어떻게 변하나=약식기소와 즉결심판은 사라진다. 대신 사건은 경죄 전담 재판부에서 담당한다.
각 지방법원에 설치되는 경죄재판부는 매일 법정을 연다. 공소 제기가 있으면 당일이나 늦어도 다음날 심리를 마친다. 피고인이 출석한 당일에 판결을 선고하고, 벌금형 집행도 당일 이뤄지게 된다.
▽대상=징역 1년 이하의 사건이어야 한다. 사건을 경죄 재판 절차로 처리할 것인지는 검사가 1차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법원이 경죄처리절차로 처리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사건을 정식 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
가령 폭행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검사는 징역 6월 정도라고 생각해서 경죄 재판 절차로 넘겼는데 판사가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해 징역 1년6월은 선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식 재판부로 넘기는 방식이다.
▽서면재판과 출석재판 중 선택=벌금형에 해당되는 범죄일 경우 피의자가 희망하면 서면재판을 선택할 수 있다. 재판에 출석할 필요가 없는 것.
검사의 판단에 따라 정식재판이냐, 약식기소(서면재판)냐가 좌우되는 현행제도와는 달리 피의자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재판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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