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맞는 등대소장 허근씨 “바다길잡이 반평생 후회 없어”

  • 입력 2004년 6월 28일 19시 06분


“비록 몸은 섬을 떠나지만 망망대해에서 꿋꿋이 임무를 다하는 등대처럼 제2의 인생을 살겠습니다.”

인천 팔미도등대 소장인 허근(許根·60)씨가 33년간의 등대지기를 마치고 30일 뭍으로 나온다.

그는 1971년 11월 친지 소개로 등대원 시험에 합격한 뒤 인천 옹진군 영흥면 부도에서 등대지기를 시작했다.

이듬해 2월 결혼한 그는 등대 숙소에 마련한 신혼방에서 난방이 되지 않아 부인과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당시 생필품 지원이 잘 안돼 땔감을 직접 산에 올라가 구하기도 했다.

파도가 높아지면 배가 뜨지 못해 부식과 식수공급이 며칠씩 끊겨 고생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도 등대에서 첫째와 둘째를 본 그는 선미도등대를 거쳐 한국 등대의 효시인 팔미도등대로 가면서 교육문제로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가 아프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면 내가 이 일이 아니면 할 것이 없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어요.”

그는 “친인척, 또는 지인 등의 경조사에 참석할 수 없어 사람 구실 못할 때가 더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파도와 갈매기를 친구 삼아 등명기(燈明機)를 밝혀 온 삶은 고독과 그리움 그 자체.

등대원이 되기 위한 적성능력에는 ‘고립된 장소에서 근무할 수 있는 인내력과 책임감’이 포함돼 있어 어쩌면 그런 고독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33년의 등대지기 생활 중 13년을 팔미도등대에서 생활한 그는 이 등대에 애착을 느낀다.

지난해 12월 22일 새 등대 점등과 함께 100년간의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팔미도등대를 지켰다.

“촌놈이 이 일 안했으면 사람 구실 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절망과 허망도 겪어봐야 세상사는 맛을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등대를 지킬 든든한 후배들이 있어 후회는 없습니다.”

인천=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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