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 조례청구’ 지자체 몸살…상위法 없는데도 발의

  • 입력 2004년 2월 12일 19시 34분


주민들의 직접적 행정참여 수단으로 도입된 주민발의 조례청구 제도가 법의 허점으로 곳곳에서 마찰을 빚고 있다.

현행법상 주민들이 발의한 조례안은 조건 없이 지방의회에 상정된다. 그러나 조례가 지방의회를 통과해 공포된 이후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무효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까지 있어 행정력 낭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마찰 빚는 조례청구=부산시에서는 현재 영유아 및 아동을 위한 보육조례 제정을 위해 시민단체가 주민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 부산시는 상위법인 영유아보육법이 지난달 개정돼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만큼 이 법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만들어진 이후 조례를 청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조례 제정을 강행할 움직임이어서 주민발의 조례는 개정법의 시행 전까지만 운용될 전망이다. 부산시는 잦은 조례 변경으로 주민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경기 구리시에선 지난해 12월 구리YMCA 등 시민단체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공직자 소환에 관한 조례를 청구했다. 이 조례안은 시장 및 시의원이 위법행위나 직권남용, 직무유기 의혹을 받을 경우 시의원은 지역구 유권자의 20% 이상, 시장은 10% 이상의 서명을 받아 주민들이 재신임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례안은 상위법이 없는 데다 헌법이나 선거법 등과 상충될 가능성이 높아 조례 제정시 타당성을 놓고 법적 다툼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인천 부평구에선 2001년 12월 주민 발의로 미군 부평기지 이전에 관한 구민투표 조례가 제정됐다. 부평구는 미군부대 이전은 안보 및 외교와 관련된 정부 정책으로 지자체 소관업무가 아니라며 구의회에 재심의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2002년 4월 부평구가 승소함으로써 이 조례는 자동 폐기됐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최근 시와 시의회, 시민단체가 추천하는 20명의 인사로 미군 부평기지 반환인수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조례안을 청구할 계획이어서 또다시 마찰이 우려된다. 인천시는 이 조례안 청구를 위해 시민단체가 요구한 대표자증명서 발급을 거부했고 시민단체는 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법적 보완 시급=구리시 등 경기 동부권 10개 시군은 최근 정부에 상위법령에 위배되거나 법적 근거가 없는 내용의 조례안은 청구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관련법의 개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중 명백히 위법한 조례는 청구하지 못하도록 관련법의 일부 내용을 수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리=이재명기자 egija@donga.com

부산=조용휘기자 silent@donga.com

인천=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주민발의 조례란▼

2000년 3월 제정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지자체별로 유권자(만20세 이상)의 20분의 1 범위 안에서 일정 수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누구나 조례 제정을 청구하거나 기존 조례의 개정 또는 폐지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지자체는 주민들이 발의한 조례안을 임의로 고칠 수 없다. 이 때문에 위법하거나 다른 법과 상충된 조례안이 지방의회를 통과하면 지자체는 지방의회에 재심의를 요구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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