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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1월 4일 16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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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 스타이브샌트 수학과학기술고교는 9·11 사건의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불과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맨해튼 빌딩 숲 사이에 역시 10층 높이로 솟아있어 간판만 없다면 행인들은 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교 2학년에 해당하는 이 학교 10학년 박혜민양은 오전 6시50분에 리버데일에 있는 집을 나서 지하철로 학교에 온다. 첫 수업은 오전 8시. 보통 오후 4시에 수업이 끝난다. 그때부터 합창단 등 클럽활동을 하다보면 오후 6시를 넘기기 일쑤. 집에 돌아와 다시 숙제에 매달리다 보면 밤 12시가 훌쩍 넘는다.
혜민양의 어머니 로렌 박(45·스타이브샌트 고교 한인학부모협회장)은 “미국 동부의 명문사립고와 같이 높은 질의 교육을 무료로 받고 있다”며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기 때문인지 일반 공립학교와 달리 졸업생들이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에 많이 진학한다”고 소개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의 성적을 보면 1600점 만점에 평균 1427점(영어 693점, 수학 734점)으로 일반 공립학교 학생들보다 750점 높다. 4년제 대학 진학률 100%는 당연하다는 얘기다.
안내데스크가 있는 널찍한 로비 한쪽으로 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졸업생들의 명단과 나란히 9·11 사건 현장에서 숨진 졸업생 9명의 명단이 벽에 새겨져 있다.
2002년 9월 결혼 예정이던 90년 졸업생은 세계무역센터(WTC) 97층에서 일하다 약혼녀를 남기고 숨졌다. 사고 당시 30세의 88년 졸업생은 두 살난 아들 애셔를 남겼다. 97년 졸업생은 바로 그 해인 2001년 앰허스트대에서 학위를 받고 WTC 99층에서 근무하다 짧은 생을 마쳤다.
#과학고에 무용 스튜디오와 극장이 있다니…
WTC가 세계의 한가운데, 미국의 중심부였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스탠리 티텔 교장이 1층 회의실로 들어왔다.
“우리 학교에 들어온 사람은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졸업 후에도 학교나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환원할 길을 찾으라고 가르치지요. 학교에 들러서 강의를 할 수도 있고….”
#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공부를 10개층에는 12개의 실험실과 크고 작은 77개의 강의실, 450대의 컴퓨터와 4만권의 장서가 구비돼 있었다. 각 층은 엘리베이터로 연결돼 있고 1층 로비 외에 2층에 육교로 바로 통하는 출입문이 나 있다.
안내를 맡은 레니 레빈은 “실험실과 강의실뿐 아니라 무용 스튜디오 체력단력실 수영장 극장까지 갖추고 있다”고 소개했다. 수업은 대부분 토론식으로 진행되고 대학수준의 강의를 듣고 대학학점을 미리 딸 수 있는 제도인 심화과정(AP) 프로그램도 55개나 개설돼 있다.
AP과정은 미국대학협의회가 하버드대 등 명문대 신입생과 명문고 학생들의 학습능력을 조사한 뒤 개발한 것으로,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과제를 내는 심화학습 과정이다. 이곳 학생들이 매년 각종 올림피아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은 물론이다. 또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곳은 이곳뿐이 아니다. 자신이 다루고 싶은 주제를 골라 대학 등에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한 해 재학생 수백 명이 뉴욕시내 대학 연구소 병원에서 연구한다.
‘과학영재학교’로 불리지만 수학 과학 기술뿐 아니라 인문 사회과목도 중시한다. 실제로 이 학교가 배출한 1993년 노벨상 수상자 로버트 포겔 시카고대 교수는 과학자가 아니라 경제학자였다. 또 과학기술계뿐 아니라 정치 법조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졸업생이 많다.
#시를 쓰는 과학자 배출이 자랑?
티텔 교장은 “학생들은 누구나 저마다 나름대로의 재능과 소질을 지니고 있어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한 분야 이상에서 영재성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대학진학 준비교육에 보다 관심을 두고 있고 영재교육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학교를 둘러본 서울대 박성익 교수(한국영재교육학회 부회장)의 진단.
박 교수는 “스타이브샌트 고교가 과학영재를 위해 과학교과목에 학습비중을 두기보다는 인문 사회 예술 체육분야까지 폭넓은 교과목을 개설해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수준과 기호에 맞는 학습을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노벨상 수상자인 졸업생 로알드 호프만 코넬대 석좌교수가 세계적인 화학자로서는 드물게 시인이며 철학자로 활약하고 있는 것도 이곳에서의 교육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호프만 교수는 화학의 대중화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세계 각국에서 방영된 ‘화학의 세계’라는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고, 4월 국내 연극무대에 올려진 과학연극 ‘산소’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
내년에 고교에 입학하는 박씨 부부의 아들 앤드루는 지난주 스타이브샌트 고교 입학을 위해 뉴욕시가 주관하는 6개 과학고 연합고사를 보았다. 매년 2만7000명이 응시하는 이 시험에서 750등 안에 들어야 신입생이 될 수 있다. 합격자 발표는 내년 초.
#한국계 200명…이민자가 절반이래요
입학에는 가정환경 영향력 수입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3시간의 수학 읽기 필답고사만으로 당락이 갈라진다. 명문사립고의 수업료 연 2만5000달러 가치의 교육을 4년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기회.
레빈씨는 이 수업료를 대부분 뉴욕시가 부담하고 일부는 기부금으로 충당한다고 설명했다.
“뉴욕시의 지원이 대단한 편이지요. 한 상원의원이 자신의 아이를 입학시키고 싶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시험을 보라’고 대답했지요. 시험이 우수한 학생을 뽑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요.”
거의 100년간 스타이브샌트 고교는 이 같은 시험으로 뉴욕의 똑똑한 아이들을 끌어 모았고 그 결과 전국에서 손꼽히는 고교가 될 수 있었다. 이 같은 명확한 엘리트 교육제도는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많은 아이들을 불러오고 있다. 박씨 부부 역시 ‘아이의 교육을 위해’ 혜민양이 한 살 때 이민을 왔다. 스타이브샌트 고교 신입생의 30%는 이민자, 20%는 이민 2세대다. 학생 중 절반이 본인이나 부모가 외국에서 온 셈이다.
박씨 부부의 경우도 혜민양은 이민자, 동생 앤드루는 이민 2세대로 분류된다. 한국계 학생의 수는 200명을 헤아리며 동양인으로는 중국계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호프만 교수 역시 폴란드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47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스타이브샌트 고교나 하버드대, 더 나아가 노벨상을 꿈꿀 수 있었을까.스타이브샌트 수학과학기술 고교는?
미국 동부의 대표적인 공립과학고교. 뉴욕 맨해튼 남쪽 허드슨강 옆에 위치해 있다. 정확한 주소는 체임버스 스트리트 345번지. 고등학교 과정인 9∼12학년 3000명이 다니고 있다. 1904년 기술을 가르치는 남학교로 설립됐다가 1964년 남녀공학이 됐다. 1992년 수백만 달러를 들여 지은 10층짜리 현재의 건물로 이사했다. 지난달 19일부터 1년 예정으로 졸업생 재학생 학부모가 참여하는 대대적인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www.stuy.edu
뉴욕=김진경기자 kjk9@donga.com

▼스타이브샌트 고교는▼
미국 동부의 대표적인 공립과학고교. 뉴욕 맨해튼 남쪽 허드슨강 옆에 위치해 있다. 정확한 주소는 체임버스 스트리트 345. 고등학교 과정인 9∼12학년 3000명이 다니고 있다. 1904년 기술을 가르치는 남학교로 설립됐다가 1964년 남녀공학이 됐다. 1992년 수백만달러를 들여 지은 10층짜리 현재의 건물로 이사했다. 지난달 19일부터 1년 예정으로 졸업생 재학생 학부모가 참여하는 대대적인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www.stuy.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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