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前장관 폭로계기 다국적 제약회사 '로비' 도마위에

  • 입력 2002년 7월 11일 18시 31분


이태복 보건복지부 장관이 11일 전격 경질된 배경으로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설을 거론함에 따라 로비의 실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28개 다국적 제약회사 모임인 다국적 제약사 협의회(KRPIA) 회장사인 한국릴리 측은 이날 로비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서 로비 실체가 당장 규명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 장관이 국내외 제약회사, 특히 다국적 제약회사가 격렬하게 반대했던 정책 사례로 든 것은 약가 재평가제도 추진이었다. 이 제도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개발해 특허권 보호를 받으면서 고가로 판매해오던 약 가운데 특허기간이 끝나 약가를 낮출 요인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국내공급가를 내리지 않는 약품에 대해 원가분석 등을 다시 실시해 가격을 대폭 낮추려 한 것.

복지부는 이 장관이 취임 직후 이 제도 도입을 준비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현재는 실무협의를 거의 마친 상태다. 하지만 이 장관이 경질됨에 따라 향후 도입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이 장관은 약가 재평가제도를 추진한 이유로 “다른 방법을 통해 약가 거품을 빼는 것은 5% 정도 인하 효과밖에 없다”면서 “현실적으로 20∼30%에 이르는 약가 거품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병의원이 청구한 의료급여비 심사를 통해 고가약 사용을 간접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11일 현재 1조8625억원에 이르는 국민건강보험 재정 적자를 개선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급단계에서부터 약가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

이 장관은 “다국적 제약사는 곧 연간 2조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황금어장인 한국시장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으며 약품 한 품목의 연간 매출이 1000억원대에 이른 것도 있다”면서 “유럽의 선진국에 비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3분의 1정도인 한국에서 유럽과 같은 약값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약가 인하 시도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 장관은 이 제도 시행과 관련한 ‘워킹그룹(실무 작업팀)’ 활동 과정에서 다국적 제약사가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국 주재 대사를 동원한 압력과 다국적 회사 사장의 항의로 이어졌으며 급기야는 장관에 대한 협박전화까지 있었다는 것.

다국적 제약업계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반대 이유는 재평가 기준이 합리적이지 못해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안 봐주는’ 일이 생길 수 있으며 해당 약품의 정확한 효능은 따지지 않고 비슷한 효능을 가진 카피 약품과 약가를 단순비교해 자신들의 오리지널 약을 고가로 분류할 개연성이 높다는 것.

KRPIA 회장은 현재 한국릴리의 마크 존슨 사장이 맡고 있다. 한국릴리사 대외협력담당 이기섭 부사장은 11일 “마크 사장이 이 장관에게 협박전화를 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면서 “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장관과 청사 밖에서 몇 차례 모임을 가진 적이 있으나 정부의 약가나 건강보험정책이 자의적으로 이뤄져서는 안되고 일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론만 강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 부사장은 또 미국 정부기관 로비설에 대해 “주한 미대사관 등 미 정부 기관에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달라며 부탁을 하거나 자료를 만들어준 사실이 전혀 없다”며 부인했다.

▼제약업계 로비…거액 리베이트 이미 관행▼

과거부터 제약업계의 로비는 집요하며 공격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제약업계 로비의 집요함은 약품 채택에 대한 반대급부로 건네지는 ‘랜딩비’ ‘리베이트’라는 부정적인 용어가 의료계 깊숙이 뿌리내린 데에서 알 수 있다.

다국적 제약업계의 경우 의료계를 상대로 각종 국내 학술대회 개최관련 지원, 해외 학회 참가비 지원, 행사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의료계는 아직도 ‘제약사 의존증’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제약사 로비에 한번 걸려들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말이 경구처럼 나돌기도 한다.

복지부의 한 관리는 “이 같은 제약업계의 로비관행 때문에 이 장관은 약무정책 관련 부서의 일처리 속도가 늦거나 담당자들이 업계의 입장을 보고하면 이들이 업계와 유착된 것이 아닌가하는 시선을 자주 보냈다”고 말했다.

복지부의 또 다른 관리는 “제약사들이 요즘은 공무원들에게 직접 금품을 제공하며 접근하지는 않는다”면서 “대신 정치권이나 복지부 고위간부 출신 등을 동원해 간접적이지만 공직사회의 특수성상 큰 압력이 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업계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헌주기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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