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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24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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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구룡사 주지 정우(頂宇) 스님은 정성껏 고른 난 하나를 들고 천주교 포이동교회 주임 박근태(朴根泰·베네딕도) 신부를 찾아갔다. 이 절의 신도들은 1주일여전 ‘예수님 오신 날을 축하드립니다’는 플래카드를 성당과 사찰입구에 붙였다.
구룡사는 85년 천막 하나로 시작해 등록신도 2만여세대의 큰 사찰로 성장했고 90년 양재동 본당에서 분리 신설된 포이동교회는 3000여명의 신도가 등록돼 있지만 아직 정식 건물을 짓지 못해 가건물 3동에서 지내고 있는 ‘개척교회’.
놀이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절과 교회는 10년여 동안 ‘인정(人情)’을 나눠온 사이. 지난 부활절에는 성당에서 절로 부활절 달걀을 보내왔고, 연극 극단인 ‘신시’를 후원하고 있는 절에서는 공연 티켓을 보내오기도 했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면 성당에서는 어느 때고 마당을 주차장으로 내준다. 성당 신도의 자녀들은 구룡사 부설 유치원에 다닌다.
합장으로 예의를 표시한 박 신부는 “내년부터 ‘집 짓는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가건물에서 마지막으로 맞는 성탄이어서 남다른 감회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정우 스님은 “저도 천막에서 3년여를 살았기 때문에 집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내년 성탄에는 아름다운 성전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두 성직자는 종교간 갈등 및 성탄의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정우 스님은 “부처와 예수, 마호메트께서 세상에 오신 의미와 정신은 모두가 같을텐데 그를 따르는 분들이 서로의 아집과 편견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 같다”며 “세 분이 한 시대에 존재하셨더라도 결코 다투거나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신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현하시기 위해서였고 ‘전쟁’ 보다는 ‘공존’이 우리들의 화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화답했다.
두 성직자는 “내년에는 절과 성당에서 ‘부처님과 예수님 말씀’을 서로 나누도록 하자”고 약속했다. 절과 성당에 축복처럼 서설(瑞雪)이 내렸다.
<오명철기자>oscar@donga.com
▼고아출신 재미동포 하만경씨‘報恩’▼
성탄 하루전인 24일 장애인복지시설인 경기 고양시 일산구 탄현동 홀트복지타운에는 귀한 손님이 한명 찾아왔다. 6·25 한국전쟁 고아 출신으로 현재 세계적인 스포츠 기업 나이키사(社)의 미국 본사 부사장인 하만경(河萬璟·미국명 조지프 하)씨가 280명의 원생과 뜻깊은 하루를 보낸 것.
그의 방한은 지난달 미국 포틀랜드 공연길에 올랐던 홀트 장애인 합창단 ‘영혼의 소리로’ 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공연이 끝난 뒤 합창단원들에게 성탄절 파티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번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방한한 것.
하씨는 이날 원생 280명을 위해 피자와 치킨 등으로 조촐한 점심상을 마련했고 스포츠용품과 옷가지를 성탄 선물로 전달했다. 또 몸이 불편해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어린 중증장애인들을 직접 찾아가 손을 잡아주며 따뜻한 성탄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박사학위를 따고, 유명 기업의 임원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숱한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다소 엉뚱하면서도 간단했다.
“저는 외롭지도 불쌍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의지하고 남의 힘을 빌려 생활하는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 주신 재능을 갖고 있으니 이를 잘 활용하고 개발하면 자신과 이웃이 행복해지지요.” 그는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에 관한 일체의 질문에 대해선 “나에 대한 관심은 이곳 장애인들에게 대신 보내달라”며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나이조차 밝히길 사양했다.
“성경에 ‘세상의 빛이 되어라’는 말이 있죠. 좋은 일을 하라는 뜻일 겁니다. 또한 누구든 세상과 이웃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되겠죠. 우리 장애인들도 세상의 빛이 되도록 모두가 손을 잡아 주었으면 좋겠네요.” 그가 대답대신 한 말이다.
<고양〓이동영기자>arg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