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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17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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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를 졸업한 92학번 김정국씨(30·가명)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학번’으로 생각한다. 김씨는 출생률이 가장 높았던 시기인 1972년도에 태어나 대학입시 때도 사상 최고의 경쟁률속에서 재수 끝에 명문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있던 97년, 갑자기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경제난으로 취업은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 됐다.
김씨는 졸업 대신 1년동안 휴학한 후 99년 2월 졸업했지만 인문학을 전공한 그에게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김씨는 수십차례의 취직시도에 실패한 끝에 결국 대학원에 입학, 올해 8월 졸업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광복 이후 최악의 취직난’이란 또 한번의 절망적 상황이었다.
“매일 두세통씩 지금까지 50여통이 넘는 이력서를 보냈지만 헛수고였어요. 이제 너무 지쳤어요.”
은행, 증권사, 제조업계, 유통업계, 외국계 회사 등 김씨가 지원해보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을 정도다. 김씨는 전공이 자격요건에 맞지 않거나 나이 제한에 걸려 번번이 쓴맛을 봐야만 했다. 현재 기업들은 1976년 1월 이후 출생한 지원자만을 받고 있고, 군대 복무기간을 인정하더라도 74년생이 마지노선이다.
김씨는 10년동안 연애를 해온 동갑내기 상대와 올해 초 결혼까지 한 상태다.
“나이가 찬 여자를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 없었어요. 명문대까지 나왔는데 남들보다 취직은 쉽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결혼을 했는데….”
아내의 아르바이트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그는 요즘 하루하루가 지옥같다고 말한다.
“능력이 모자라서인지, 잘못된 교육제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배운 것만으로는 취업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학교 공부에는 충실했는데….”
소위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김씨는 지난 세월을 허송했다고 생각한다. 고교내신 1등급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딴 자신이 취직도 못하는 현실을 그는 이해할 수 없다.
김씨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눈을 뜨면 e메일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혹시나 지원한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가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e메일을 확인한 뒤 그는 각종 인터넷 사이트 구직란에 이력서를 올리고 취업정보를 검색한다. 그러다 보면 점심시간. 아내가 차려준 밥을 대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김씨는 요즘 새 습관이 생겼다. 집으로 오는 전화는 일절 받지 않고 휴대전화로 오는 전화는 발신자가 누군지 꼭 확인한 뒤 받는다. 취직에 대해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과는 통화하기 싫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위로전화도 이제는 부담스럽다. 근심 어린 관심조차도 스트레스가 된다. 현재 김씨는 이유없는 두통과 소화불량, 체중감소 등에 시달리고 있다.
<박민혁기자>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