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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11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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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서울시내 모 카페에서 만난 조선족 박상철씨(46·가명)는 불법체류자 신분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서인지 사방에 시선을 던지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말을 하면서도 모자를 푹 눌러쓴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의 한쪽 눈은 거의 실명상태였다.
박씨는 여수 수장사건을 거론하면서 ‘현대판 노예선’을 탔던 자신의 경험이 악몽처럼 되살아나는 듯 치를 떨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중장비기사로 일하던 그가 한국행 밀항선을 탄 것은 올해 3월1일. 6년 전 “한국에 가서 몇 년 고생해 큰돈을 벌어 오겠다”며 떠난 아내가 소식이 끊기자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 것. 아내가 밀입국을 하면서 진 빚도 갚아야 했다.
2월말경 헤이룽장에서 기차로 14시간 떨어진 다롄(大連)에 도착한 뒤 이틀만에 다른 조선족 90여명과 함께 배를 탈 수 있었다. 서해를 사이에 두고 평양과 마주한 다롄은 한국행 밀항선을 타기 위한 밀입국자들의 1차 집합장소.
3월1일 새벽, 어둠 속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하듯 30여명씩 3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다롄에서 가까운 항구로 이동한 일행은 배에 오르자마자 고기를 넣어두는 어창에 20여명씩 나뉘어 실렸다.
만 하루쯤 지났을까. 박씨 일행을 태운 어선은 공해상으로 빠져나오더니 대기 중이던 한국 어선에 일행을 인계했다. 중국 배보다 더 작은 어선이었다. 서너평짜리 어창 안에 20여명씩 들어 앉아 다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었다. 게다가 시간에 맞춰 물을 퍼내지 않으면 금세 허리까지 물이 차 올랐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부족한 공기 때문에 가쁜 숨을 몰아 쉬어야 했다. 그나마 펌프로 물을 퍼내기 위해 이따금 선창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번의 경우처럼 모두 질식해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 박씨의 설명.
꼬박 4일이 지나자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드디어 어창 문이 열렸다. 일행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한국인 브로커가 대기시켜 둔 15t 덤프트럭에 올라탔다. 약 1시간이 지나 트럭이 멈춰 선 곳은 산밑의 외딴 집. 이튿날 일행들은 한사람씩 불려나가 중국의 가족과 통화를 해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며 약속대로 6만5000위안(약 1000만원)을 중국 현지 브로커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중국 브로커들이 한국 브로커들에게 ‘돈을 받았다’는 연락이 오면 차례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박씨는 “위장결혼, 친지방문, 산업연수생 등 합법을 가장하는 방법은 선불(약 1000만원)인데다 성사가 안 돼 돈만 떼일 가능성이 높다. 밀항은 현지도착 후 후불이기 때문에 위험하지만 확실해서 밀항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중국 현지에서 가족들이 브로커들에게 돈을 보내지 못할 경우 한국에 도착한 사람들은 한국 브로커들에 의해 행해지는 처참한 인권유린 앞에서 또 한번 치를 떨게 된다. 당시 박씨를 포함한 일행 30여명도 완납이 늦어지자 ‘돈을 빨리 지불하라’며 닦달하는 한국인들에게 짐승처럼 폭행을 당했다.
브로커들은 돈이 제대로 전달됐음이 확인될 때까지 쇠파이프 등으로 마구 때리면서 중국 가족들에게 비명소리를 전하게 했다. 발가벗겨진 채 방에 감금된 여자들은 하나씩 불려나가 성폭행까지 당했다.
나흘 간의 모진 구타와 여자들의 비명소리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박씨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할 수 있느냐”며 대들다가 장정 6명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고 의식을 잃었다. 며칠이 지나 깨어났을 때는 서울의 한 조선족 보호시설에 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브로커들이 길가에 버린 것을 길을 가던 40대 남자가 발견,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고 택시를 태워 이곳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박씨는 그 때 당한 구타로 오른쪽 눈이 실명위기에 처해 있으며 뇌출혈 증상마저 있어 직업도 구하지 못한 채 10개월 째 치료를 받고 있다.
<김창원기자>cha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