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파업임박]공기업 개혁 '험난한 冬鬪고비'

  • 입력 2000년 11월 23일 18시 34분


《공공부문 개혁이 한전 민영화를 둘러싼 노정 갈등으로 암초를 만났다. 공공부문 개혁은 정부의 4대 부문 개혁 작업 중 가장 ‘열등생’이라는 지적을 듣고 있는 분야. 특히 공기업의 구조조정 없이는 공공부문 개혁은 구두선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의 갖가지 문제점을 풀기 위해서는 공공부문의 개혁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지적된다. 이런 가운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전 노조가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노동계에 미칠 영향▼

▽공공부문의 동투(冬鬪) 될까〓한전 노조 파업이 가시화됨에 따라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 ‘동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오경호(吳京鎬)노조위원장은 “전력산업 개편안이 통과되면 전기료 인상과 전력공급 차질이 불 보듯 뻔하다”며 “전력노조가 공공부문의 투쟁을 선도하는 입장인 만큼 어떻게든 민영화를 막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당초의 일정과 방침대로 23일 한전 민영화 관련법을 연내 국회에서 처리하겠다고 맞서고 있어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노조와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한전이 공기업 구조조정의 핵심인데다 한전 노조의 파업은 구조조정에 따른 노동계의 조직적 저항의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이번 사태가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공공부문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동계가 한전 노조의 파업을 시작으로 내주부터 본격적인 투쟁에 나설 계획이어서 구조조정을 둘러싼 노―정간 긴장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노동계는 대규모 도심집회와 연대파업 등 초강도 투쟁에 나설 예정인 반면 정부는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며 불법투쟁에 강력히 대처할 방침이다.

민주노총은 23일 성명을 통해 “다음주를 ‘구조조정과 노동법 개악 저지 집중투쟁 주간’으로 정했다”며 12월 총파업 투쟁을 앞두고 공공 금속 사무금융 대학노조가 참여하는 파업과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휴일인 26일에는 한전 철도 및 한국통신을 주축으로 하는 양대 노총 공공부문 노조가 서울역 광장에서 3만여명의 조합원이 참가한 가운데 ‘공공부문 노동자대회’를 개최하며 이어 명동까지 거리행진을 벌일 계획이다. 또 도시철도노조는 12월 8일, 철도노조는 15일에 각각 파업에 돌입할 예정이어서 12월5일부터 시작되는 한국노총의 파업투쟁 계획과 함께 투쟁열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시험대 오른 구조조정▼

▽정부 준비부족 노출〓한전 노사 갈등사태는 개혁작업에 대한 각 주체의 ‘총체적인 부실’을 담고 있다. 일단 정부의 준비 부족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한전 민영화 방침이 처음 나온 것은 94년. 그러나 지난 6년의 준비 기간에 정부는 반대론자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 민영화 이후의 비전 제시에도 실패했다. 결국 국회에 법안을 상정하는 시점에 노조와 극한대결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정부는 특히 다른 공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 반대 명분을 줬다는 지적을 듣고 있다.

정치권의 눈치보기도 발목을 잡았다. 한전 구조개편법안은 작년 말 국회에 상정됐으나 총선을 앞두고 노조의 낙선 운동을 의식한 의원들이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부진한 공기업 개혁〓한전 사태는 공기업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번 절감케 했다. 그렇다고 이를 피해갈 수는 없다.

최근 감사원 감사 결과도 ‘공기업 수술’의 필요성을 재확인해 준다. 감사 결과는 공기업 개혁에도 불구하고 방만한 경영이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한국통신의 경우 2년간 1만2000명을 줄였는데도 인건비가 오히려 22%나 늘었다. 이런 부실 경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을 가속화해야 하지만 이런 저런 문제로 개혁 작업은 더디기만 하다.

한국담배인삼공사의 경우는 공기업 개혁의 ‘험로’를 보여준다. 이 회사는 올 연말까지 사원 5241명에서 741명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올 상반기에 명예퇴직 신청자는 29명에 불과했고 하반기 들어서는 단 1명도 없다. 여기에 노조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담배농가가 많은 지역구의 의원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시늉내기 구조조정〓기획예산처에 따르면 정부는 2001년까지 공공부문에서 4만1000명의 인력을 감축할 방침이다. 98, 99년에 이미 3만2000명의 인원을 감축했으며 올해는 9000명을 마지막으로 줄일 예정.그러나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시늉내기’에 그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공기업들은 퇴직 직원을 단순 기능직으로 채우거나 일단 퇴직시킨 뒤 재고용하는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가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명재·김준석기자>mjlee@donga.com

▼정치권 긴장… 우려…▼

사상 초유의 한국전력 파업사태를 하루 앞둔 23일 정치권도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한전 노조의 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대규모 정전사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한전노조가 당초 국회 산업자원위에서 전력산업구조개편안을 심의키로 한 24일을 파업일로 잡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국회 파행이 계속되면서 산업자원위의 심의도 순연됐기 때문에 노조측도 당장 파업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 정책위 관계자는 “산업자원위 공전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한전 노조가 어떤 결정을 할지 주시하고 있다”며 “파업에 대비, 정전사태를 막기 위해 대체인력을 이미 확보해놓은 만큼 ‘전력대란’이 빚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여권은 그러나 만약 한전노조가 파업에 돌입할 경우 불법파업인 만큼 공권력을 통해 강력히 대응한다는 입장이다. 여권은 이번 파업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올해 말까지 완료키로 한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즉 6개 사업 분할매각을 골간으로 한 전력산업 구조개편이 실패할 경우 공기업 구조조정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그러나 파업사태를 막기 위해 조성준(趙誠俊)의원과 박인상(朴仁相)의원 등 노동계 출신 의원들과 신기남(辛基南) 제3정조위원장 등으로 하여금 노조측과의 대화 및 중재에 나서도록 했다.

이와 함께 민주당은 2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전의 6개사 분할 및 민영화 원칙을 재확인했다. 민주당은 한전 민영화 관련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되 시행은 2년 정도 유예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노조측은 분할매각 대신 독립채산제를 주장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한나라당 이한구(李漢久)제2정조위원장은 “당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바는 없지만 일단 민영화는 대세라고 생각하나, 문제는 전력산업을 어떻게 끌고 가겠다고 하는 정부의 명확한 비전 제시가 없었던 점”이라며 “이것이 한전 노조원들의 불안감을 촉발시킨 것 같다”고 지적했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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