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준 게이트]로비자금 10억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 입력 2000년 10월 29일 18시 56분


《국제통화기금(IMF)경제난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경제계 사정(司正)을 담당하던 금융감독원이 본격적으로 검찰 사정의 도마 위에 올랐다.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이 ‘금감원 로비 의혹’으로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당초 제기된 의혹들이 속속 사실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 사건의 실체 규명에 못지 않게 검찰이 금감원의 ‘썩은 칼자루’를 도려낼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수사상황▼

우선 이례적인 것은 검찰의 신속한 수사속도. 검찰은 27일 불법대출을 주도한 동방금고 이경자(李京子·56)부회장과 한국디지탈라인 정현준(鄭炫埈·32)사장을 구속하자 마자 금감원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이기배(李棋培)서울지검 3차장은 28일 금감원 로비의혹에 대해 “지금까지 의혹이 제기된 모든 사안을 조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검찰은 29일 유일반도체의 저가 신주인수권부사채(BW)발행에 대한 조사업무를 맡았던 조사총괄국 관계자 2명과 대신증권 불법대출에 대한 특별검사를 담당했던 비은행 검사국 실무자 2명을 시작으로 본격 소환조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계좌추적을 조만간 실시할 예정이며 추적 대상에는 금감원 직원들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지금까지 밝혀낸 것은 유일반도체의 장성환사장과 이부회장, 정사장 등이 서로 공모해 금감원에 대한 로비자금 명목으로 10억여원을 조성했다는 사실에 불과해 이 돈이 실제로 로비에 사용됐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10억원 로비자금 조성은 “이부회장이 평소 금감원 고위관계자인 이모, 김모씨 등과 친분이 깊다고 자랑했고 유일반도체에서 제공된 10억여원은 상당히 고위층까지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해온 정사장의 진술에 신빙성을 높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전망▼

검찰은 계좌추적을 통해 로비의 물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과정에서 정치인 연루의 단서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한 벤처기업인은 “이번 사건에 정치인이 연루됐다면 이권을 대가로 돈을 받았다기 보다는 사설 펀드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는 대신 투자자를 연결해 주거나 금감원 관계자 등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는 소환된 금감원 직원의 진술을 통해 정치인이 역추적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검찰이 보는 두가지 시나리오▼

‘정치권 실세와 벤처가 결탁한 권력형비리’인가, 아니면 ‘철없는 벤처 기업가와 노련한 사채업자, 감독기관의 유착이 만들어낸 금융사고’인가.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7일째로 접어들면서 이 사건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29일 ‘느낌’을 전제로 “이번 사건이 의외로 단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코스닥이 활황일 때는 돈이 필요한 한국디지탈라인(KDL) 정현준(鄭炫埈)사장과 돈놀이를 할 상대가 필요한 동방금고 이경자(李京子)부회장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가 주가가 폭락하면서 함께 몰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금융사고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와 관련해 국세청의 한 고위관계자도 이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정사장은 현재 현찰은 거의 없는 빈털터리 상태”라고 말했다. 정사장이 한때 수조원대의 재산을 가진 거부로 알려졌지만 이는 코스닥 주가가 상한가를 치던 시기의 평가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을 뿐 실제로 가진 현찰은 별로 없다는 것.

정사장과 친분이 있는 한 변호사도 “그는 현재 변호사 비용을 조달할 돈조차 없는 상태인 것으로 안다”며 “정씨가 이부회장의 비리를 언론에 공개하고 정치권 및 금감원과의 유착설을 주장한 것도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입장에서 자신을 철저히 이용했다고 믿고 있는 이부회장을 응징하기 위한 고육책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사장의 불확실한 태도도 이런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정사장은 검찰에 출두하기 전 이부회장의 정관계 로비의혹을 제기했다가 검찰에서는 “금감원 부분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며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불법 대출자금의 사용처와 이부회장의 금감원 로비설, 정씨의 사설 투자펀드에 대한 수사에서 의외의 성과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명건기자>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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