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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7월 1일 01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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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보고서▼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빌딩의 계단 숫자는 1860개이며 지금까지 걸어서 가장 빨리 올라간 기록은 10분30초.' 지난해 9월 미국과 캐나다를 다녀온 서울 용산구의회 의원들의 보고서 내용 중 일부다.
이 보고서에는 또 로스앤젤레스의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시찰한 소감으로 '각종 영화 세트가 잘 보존돼 아직까지도 영화 촬영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 인상깊었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용산구의회 관계자는 "여러 자료를 모으다 보니 그런 내용이 들어간 것 같다"면서도 "솔직히 해외연수가 관광성격이 짙은 것 아니냐" 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유럽을 다녀온 서울 중구의회 의원들의 보고서 중간에는 느닷없이 'Travel Point-파리의 명물, 벼룩시장'이라는 코너가 나온다. 이 코너에는 '벼룩시장에서는 부르는 가격의 3분의 2부터 흥정할 것' 등 관광책자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 그대
로 적혀 있다. 같은 책을 베꼈는지 두 의회의 연수보고서 내용이 똑같은 경우도 있었다. 참여자치 전북시민연대가 공개한 전북도 문화관광건설위원회 의원들의 보고서 (99년 2월, 뉴질랜드 연수)와 한달뒤 같은 곳을 다녀온 전주시 행정위원회 의원들의 보고서는 내용은 물론 약물이나 기호의 모양까지도 똑같았다.
▼연수실태▼
'제7일, 경비행기에 탑승해 웅장한 대협곡인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 지상에서 다이내믹한 협곡 관광 후 차량으로 그랜드캐니언, 매더 포인트, 야바파이 포인트 등 관광. 경비행기로 라스베이거스 귀환.'
2821만원의 예산을 들여 올 4월 24일∼5월 5일 미국과 캐나다에 연수를 다녀온 울산 남구의회 의원들의 세부 연수일정표 중 일부다.
이 일정표에는 첫날 토론토에 도착한뒤 2, 3일째 '시청, 주청사, 퀸스공원, 토론토대학, CN타워 등을 본뒤 온타리오 호수와 나이애가라 폭포를 관광한 것으로 돼 있다.
4일째야 비로소 '워싱턴 시의회 방문'이라는 연수에 걸맞은 일정이 나온다. 그러나 5일째 일정은 아예 '전일 시내관광'이다. 나머지 연수일정도 '라스베이거스 관광' '샌타모니카 해변에서 자유시간' 등 대부분 관광으로 채워져 있다.
이에 대해 울산 남구의회 관계자는 "선진국의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도 의원들에게는 견문을 넓히는 훌륭한 기회이며 이번 연수가 의정활동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지방의원들의 '관광성 연수'가 올들어 봇물 터지듯 늘어나자 주민과 시민단체 등이 강력하게 반발, 곳곳에서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 특히 '경산 민주단체협의회' 회원 50여명은 경북 경산시의회 의원 14명의 유럽연수를 문제삼아 의회 의장실을 점거, 농성을 벌인 끝에 6월 16일 경비 6900만원 중 2000만원을 반납받기도 했다.
행정자치부의 예산편성지침에는 '지방의원들은 임기 4년중 1회에 한해 해외연수를 갈 수 있다'고 돼 있다. 이 규정은 지방의원들에게 '어차피 한번은 공짜니 안가면 손해'라는 인식을 심어줘 관광성 외유를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행정연구원 최유성(崔惟誠)수석연구위원은 "연수 목적 및 보고서등을 철저히 검토해 다음 선거 때 심판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완배기자·대구·울산〓이혜만·정재락기자>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