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로 동아시아문제에 정통한 세계적 석학 로버트 스칼라피노 박사가 15일 오후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북한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제12회 인촌(仁村)기념강좌를 가졌다. 동아일보사와 재단법인 인촌기념회 고려대정책과학대학원 일민국제관계연구원이 공동주최한 이날 강연에는 학생 교수 시민 등 5백여명이 참석, 한반도문제에 대한 스칼라피노박사의 해박한 식견과 통찰력에 귀를 기울였다. 스칼라피노박사는 강연에서 식량난 등으로 심각한 체제붕괴 위기를 맞고 있는 북한의 여러 문제를 주변 강대국과의 역사적 관계속에서 조망하고 앞으로 한반도에 닥칠 도전과 시련을 극복, 통일로 가기 위한 대응 방향을 제시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 요지.
역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처럼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불리함에 기인한 바 크다.
남북한은 지정학적으로나 역사 사회적으로 공통적인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전혀 다른 사회체제를 유지하며 반세기 동안 분단돼 있다.
한반도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제삼자의 위치에서 남북한의 경제 정치 외교문제를 각각 조망하고 한반도 통일에 나름의 시나리오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구 소련 등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하면서 북한의 경제는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북한은 이같은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나진 선봉 청진 등에 경제특구를 설정하고 외자(外資)를 유치하기 위해 유엔에 다양한 경제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북한은 이렇다할 경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북한의 경제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지리적 여건 등 모든 면에서 유리한 한국기업인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2000년이 되면 적어도 5천명의 한국 경제인이나 기술자가 북한에서 진행중인 KEDO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의 정치는 세대교체를 하는 듯하다. 김정일과 나이가 비슷한 젊은 군부출신 인사들이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고 있고 김일성과 같은 1인독재체제가 아니라 집단주의 지도체제의 조짐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진행중인 김정일의 신격화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때보다 더욱 심한 것 같다.
북한은 중국과 구 소련과의 관계를 늘 등거리외교로 풀어왔다. 그러나 구 소련의 붕괴로 외교정책은 힘을 잃었다. 현재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북한은 지난날 구 소련으로부터 받았던 정치적 경제적 특혜를 기대할 수 없다.
현재 공식적으로나마 북한이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주변국은 중국뿐이다. 중국의 시장경제 도입과 남한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북한의 시각에서 보여지듯이 북한과 중국간의 실질적인 관계는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북한은 최근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중국과 러시아에서 잃은 것을 찾으려 하고 있다.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전제로 하는 미국의 태도때문에 북한의 의도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도 쉽지 않은 것 같다. 97년9월 재개된 북한과 일본과의 협상에서 과거 사죄문제 등에서 보여준 양자간의 마찰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미국 남한과 우호적이고 정상적인 관계를 이뤄나가기 전에는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기대해선 안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앞으로 북한의 경제나 국제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남한이다.
현재 남한의 경제는 긍정적 부정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의 경제적 발전은 눈부시지만 많은 개혁과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남한의 정치는 법에 의한 통치가 어느 정도 자리잡았고 많은 부분 선진화됐다. 하지만 아직도 정치인의 권위적인 의식이나 비공식적 정치의 만연, 지역주의 등 부정적인 면도 남아 있다.
그동안 남한의 외교적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무역마찰이 있다고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점차 공고해지고 있다. WTO체제하의 경제관계 뿐만아니라 독자적인 양자간의 관계도 계속될 것이다.
사회주의권인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도 성공적이다.이들과의 경제협력으로 남한은 상당한 국제적 영향력과 힘을 얻게 됐다.
북한과 남한에 대해 「Two Korea」정책을 펴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중국 역시 전환기에 있는 국가이며 중국은 결코 북한의 붕괴나 남한으로의 흡수를 바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독도문제, 배타적 경제수역문제 등 많은 마찰을 빚고 있지만 일본과의 관계도 점차 나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편견을 없애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모든 면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작금의 국제관계는 남북한에 대한 도전이고 위기이면서 동시에 최대의 기회일 수도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강국들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ASEAN 등 동남아국가들과의 관계도 함께 고려하면서 그 기회를 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반도의 통일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을지 몇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자 한다. 현재 누구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전제로.
첫째, 북한의 급속한 붕괴에 따른 통일이다. 이는 남한에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부담을 안기게 될 것이다.
둘째, 북한에서 내부 투쟁이 일어나 정권이 바뀌고 서서히 체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셋째, 현재보다 더욱 강한 군부 통치체제가 이뤄지는 경우다.
넷째,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다. 그러나 이는 가장 비합리적인 통일방법이라는 것을 남북한이 모두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이 경제개방을 통해 단계적이고 평화적으로 체제가 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자연스러운 진화적 과정(The Evolutionary Process)이라 부른다. 이 과정엔 남한의 경제적 도움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방법이 가장 바람직한 통일방안으로 여겨진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앞으로 남북한 모두 내외의 많은 도전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도전을 적극적 기회로 활용할 때 통일의 길은 열릴 것이다.
▼ 스칼라피노 박사 약력 ▼
△1919년 미국 캔자스주 출생 △48년 미국 하버드대 졸업 △49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조교수 △56년 버클리대 교수 △62∼65년 버클리대 정치학부장 △90년 버클리대 명예교수 △92년 미국 학술원 특별회원 △현재 미국 아시아협회 아시아문제자문단 공동의장 △「현대 일본의 정당과 정치」(62년) 「미국과 한국―전망」(79년) 등 아시아 관련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