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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정치

김정은은 왜 밤에만 열병식을 진행할까?[주성하의 北카페]

입력 2021-09-12 09:00업데이트 2021-09-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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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새벽 공화국 창건 73주년 기념 열병식이 김일성광장에서 화려한 축포와 조명 속에 개최됐다. 출처: 조선중앙TV


북한이 정권수립 73주년인 9일 0시에 심야 열병식을 개최했습니다.

이번 열병식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전략무기는 공개되지 않은 채 정규군 대신 예비군격인 노농적위군과 경찰격인 사회안전무력 소속 병력과 무기가 동원됐습니다.

살이 훌쩍 빠진 김정은의 등장, 122mm 다연장로켓과 대전차미사일 등 재래식 무기를 단 트랙터, 중앙당 본부당사 잔디밭에서 펼쳐진 연회 등 눈길을 끌만한 것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왜 대낮이 아닌 한밤중에 열병식을 진행할까요?

북한은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벌써 열병식을 세 번 열었습니다. 지난해 10월 10일 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올해 1월 8차 노동당 대회 기념 열병식도 야간에 열렸습니다.

이중 2번이 0시에 열렸고, 노동당 대회 기념 열병식은 저녁 6시부터 열렸습니다.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일 시대를 거쳐 김정은 집권 초기까지 북한의 모든 열병식은 낮에 열렸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이런 대형 이벤트는 낮에 해야 보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굳이 야간에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북한에서 열병식 시간을 최종 결정할 사람은 김정은 밖에 없습니다. 그가 낮에 하자거나 밤에 하자거나 결정을 해줘야 그대로 집행되는 것입니다.

김정은이 참가자들이 햇볕 땡볕에 노출되는 것이 걱정돼 야간에 열병식을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이미 열병식이나 집단체조 참가자들은 그 행사 하나를 위해 1년 넘게 땡볕 속에서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신변 안전을 위한 목적도 아닐 겁니다. 어차피 낮이나 밤이나 감시위성에 포착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밤보다는 낮이 카메라로 찍기에 더 좋기 때문에 홍보를 위한 것도 아닐 겁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김정은이 화려한 불꽃놀이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밤에 열병식을 진행하는 것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 바로 불꽃놀이입니다. 밤하늘에 터지는 화려한 축포와 조명의 조화는 낮에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김정은은 집권하자마자 불꽃놀이와 조명에 매우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포사격이나 미사일 발사장에 꼬박꼬박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더 넓게 보면 뭘 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축포든, 미사일이든, 뭘 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김정은의 표정은 매우 환해집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2009년 4월 14일 평양에서는 대규모 불꽃놀이 행사가 최초로 열렸습니다. 이때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처음으로 맞는 김일성 생일이었습니다.

이때 평양에 살았던 탈북민들도 나중에 정말 처음 보는 화려한 불꽃놀이였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때 진행 장소는 완공도 채 되지 않은 평양 105층 류경호텔이었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기도 합니다.

이 류경호텔 빌딩의 가장자리에서 각종 축포가 수없이 쏟아져 나와 평양의 하늘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국내 최고 높이의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이런 방식의 불꽃놀이를 주기적으로 진행합니다.

2009년 4월 14일 류경호텔에서 펼쳐진 화려한 불꽃쇼. 출처: 동아일보 DB


류경호텔 불꽃놀이 아이디어는 김정은이 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일 시절에는 이런 것에 별 관심도 없었고, 실제 진행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집권 이후 평양에선 불꽃놀이 행사가 잇따라 진행됐습니다. 설날과 주요 명절마다 대동강 위엔 화려한 축포가 터졌고, 실제로 북한도 내부적으로 주요 불꽃놀이 행사를 김정은의 업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좋아하는 것은 불꽃놀이뿐만 아닙니다. 화려한 조명 역시 아주 좋아합니다. 지난해 10월과 올해 4월엔 각종 축포와 레이저쇼가 동원된 ‘빛의 조화’라는 이름의 야간행사가 처음 열렸습니다. 심야 열병식에는 각종 색상의 조명, 발광다이오드(LED)를 단 전투기와 드론 등도 동원됩니다. 마치 미국의 독립기념일 행사 등 주요 선진국의 각종 전야제를 흉내 내는 듯합니다.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펼쳐진 ‘빛의 조화-2020’ 행사의 개막 모습. 동아일보 DB


이와 관련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지난해 7월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은 미국 행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제3차 북미정상회담 관련 입장을 피력했는데 마지막에 느닷없는 발언을 해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끝으로 며칠 전 TV보도를 통해 본 미국 독립절 기념행사에 대한 소감을 전하려고 한다”며 “가능하다면 앞으로 독립절 기념행사를 수록한 DVD를 개인적으로 꼭 얻으려 한다는 데 대하여 위원장동지로부터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뜬금포가 아닙니까.

왜 독립절 기념행사 DVD가 필요했는지 의문은 몇 달 뒤에 풀렸습니다. 10월 북한에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를 야간에 진행했는데 마치 미국의 독립기념일 행사 퍼레이드에서 본 듯한 장면들이 많이 연출됐습니다. 미국은 지난해 7월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야간 대규모 불꽃쇼와 전투기 편대를 동원한 에어쇼를 펼쳤습니다. LED를 단 전투기와 드론, 항공기에서 쏘는 폭죽 등이 김정은에겐 매우 인상 깊었나 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북한에서 열린 3차례의 야간 열병식에서 모두 구현됐습니다.

8일 노동당 본부 청사 야외에서 열린 야외 연회장 모습. 악단의 연주 속에 원형 식탁에서 만찬이 열렸다. 출처: 조선중앙통신


그뿐만 아니라 8일 노동당 본부 청사 야외에서 열린 연회도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배경으로 잔디 정원에 차려진 원형 테이블에 나눠 앉아 진행된 모습이 마치 백악관 로즈가든의 연회를 방불케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김정은은 2018년 6월 제1차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찾은 싱가포르에서 화려한 야경에 충격을 받았나 봅니다. 이후 평양의 야경이 급작스럽게 화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실내는 전혀 완공되지 못한 류경호텔도 밤에 보면 선진국의 그 어떤 화려한 빌딩보다 더 현란한 조명을 발산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이번 북한의 심야 열병식의 기획자는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이고, 이들이 본보기로 삼은 행사 기획이 바로 미국의 독립기념일 행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미로 생존해 온 북한이 미국을 열심히 따라 배운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9일 새벽 김일성광장에서 수천 명의 청년들이 참가한 무도회가 열렸다. 출처: 조선중앙TV


화려한 불꽃쇼와 조명을 좋아하는 김정은 덕분에 평양 시민들은 잠을 잘 시간인 새벽에 김일성광장에서 지새우게 됐습니다. 대동강에서 터져 오르는 축포의 멋진 배경을 연출하기 위해 수천 명의 청년들이 경축야외에 동원돼 김일성광장에서 새벽 2~3시에 즐거운 듯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각종 대북제재와 코로나 봉쇄로 북한의 현실은 점점 시궁창에 빠져드는데, 그 북한의 지도자는 누구보다 화려함을 좋아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부조화입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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