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서 꾸벅꾸벅 전두환, 시민들 “구속하라” 외침에 눈 뜨기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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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명예훼손’ 1심서 집유 2년
법원 “全, 헬기사격 사실 알고도 허위내용 담긴 회고록 출간 강행
미필적 고의로 피해자 명예훼손”… 故조비오 신부측 손 들어줘
全, 연희동 집앞 시위대 향해 “말조심해 이놈들아” 소리치기도

“사죄하라”… 울부짖는 5·18단체 회원 법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30일 5·18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인 
‘오월어머니’ 회원들이 광주지법 앞에서 전 전 대통령의 사죄를 요구하며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사죄하라”… 울부짖는 5·18단체 회원 법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30일 5·18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인 ‘오월어머니’ 회원들이 광주지법 앞에서 전 전 대통령의 사죄를 요구하며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금도 5·18로 고통받는 많은 국민들이 있다. 피고인처럼 역사를 왜곡하고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자세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30일 오후 광주지법 201호 법정. 재판장인 김정훈 형사8단독 부장판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89)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청각보조장치(헤드셋)를 착용하고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전 전 대통령은 김 부장판사의 쓴소리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눈을 감고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70분간 이어진 이날 재판 내내 꾸벅꾸벅 졸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전두환을 구속하라”는 법정 밖 구호 소리에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1997년 대법원에서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후 23년 만이다.

○ “헬기 사격 알면서 고의로 명예훼손”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실제 있었는지 여부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쓴 자서전에서 “5·18 당시 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유죄가 되려면 전 전 대통령이 헬기 사격이 있었음에도 이를 증언한 조 신부를 거짓말쟁이로 규정해 허위사실을 적시했고, 이를 고의로 유포한 사실이 인정돼야 하는데 1심 법원은 두 쟁점 모두 조 신부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1980년 5월 21일과 27일 등 두 차례 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며 판결문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판단 근거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우선 “500MD 헬기에 의한 사격을 목격했다는 피해자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돼 신빙성이 인정된다. 또 목격자 8명의 증언, 5·18 당시 계엄군으로 관여했던 군인들의 일부 증언도 이와 부합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5·18 진압에 가담했던 전투교육사령부의 광주소요사태분석 교훈집 등 군 관련 문서에도 “의명(依命·명령에 의거) 공중 화력 제공” “유류 및 탄약의 높은 소모율” 등 헬기 사격이 이뤄진 정황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당시 광주 전일빌딩에 남아있는 탄흔을 감정한 결과 헬기가 M60 기관총을 이용해 하향 사격을 한 흔적이라고 결론 낸 점도 재판부의 판단 근거가 됐다.

법원은 5·18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전 대통령이 당시 상황을 모두 보고받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허위 사실이 담긴 회고록 출간을 감행했다며 “적어도 미필적 고의를 가지고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봤다.

김 부장판사는 “전 전 대통령이 5·18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특별사면을 받은 후 정당성을 회복하기 위해 회고록을 출간해 비난 가능성이 크다”며 “판결을 계기로 피고인이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죄해 용서받고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 부장판사는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형량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시각을 의식한 듯 “피고인이 5·18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모든 5·18 피해자들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재판은 아니다”며 “진실을 말한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표현해 피해자의 법익을 침해한 부분에 대해 형을 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회고록 통한 허위 주장, 자충수로 돌아와

이날 판결에 대해 양측은 항소 의사를 밝혔다. 항소심도 광주지법에서 진행될 것으로 전망돼 전 전 대통령은 1심 때와 같이 재판 출석을 위해 서울과 광주를 오가야 한다.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선고가 끝나고 법원 밖으로 나오며 취재진으로부터 “판결을 받아들이느냐”는 질문을 받고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앞서 그는 이날 오전 8시 42분 재판 출석을 위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나설 때 ‘구속 촉구’ 시위를 하던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지지자로 착각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하지만 시위대가 “대국민 사과하라, 전두환”이라고 외치자 이내 “말조심해 이놈들아”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5·18 당시 군의 헬기 사격 여부는 1988년 5공화국 청문회나 1995년 검찰 수사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발포명령자와 행방불명자 관련 진상 규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2017년 전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조 신부를 비난하면서 헬기 사격의 진위가 주요 관심사로 부각됐다.

이듬해인 2018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는 군 헬기가 시민을 향해 기총사격을 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국방부 조사 결과는 법원이 전 전 대통령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 주요 참고 자료가 됐다. 이 때문에 전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허위 주장을 편 것이 오히려 자충수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광주=이형주 peneye09@donga.com / 이청아 기자
#전두환 사자명예훼손#5·18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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