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9일 내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을 통해 확정한 부처별 재량지출 10% 감축 방안은 재정건전성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 등에 쓸 재원을 쥐어짜서라도 마련하겠다는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경기 침체의 장기화로 세수(稅收)가 정체된 가운데 복지 등 나랏돈을 쓸 곳은 늘어나면서 정작 경제 활성화에 투입할 예산 마련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정개혁의 1순위 과제로 꼽히는 ‘복지 구조조정’을 놓고 뾰족한 수를 마련하지 못하는 정부가 깎기 쉬운 예산에만 손을 대는 미봉책으로 일관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2017년까지 세출 구조조정 및 지하경제 양성화로 135조 원을 마련하겠다는 현 정부 첫해 ‘공약 가계부’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10% 감축’이라는 재정 절감 대책이 과연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비판도 있다.
○ 선심성 복지 남발 지자체에 ‘경고’
정부가 예산안 지침에 구체적인 숫자로 못을 박아 세출 구조조정에 나서는 건 2010년 이후 7년 만이다. 세수 여건이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불어나는 씀씀이를 줄이지 않고서는 재정건전성 악화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지난해 국세 수입(217조9000억 원)이 세입(歲入) 예산 대비 2조2000억 원 더 걷히며 3년 만에 ‘세수 펑크’에서 탈출했지만 이는 세수 예상 규모를 줄이는 ‘세입 추가경정예산 편성’(―5조4000억 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올해는 중국 경기 둔화, 저유가 장기화 등으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3%대 성장률 달성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이다. 경기 침체로 세금이 안 들어오는데도 씀씀이는 줄지 않다 보니 국가채무가 올해 말 기준 692조9000억 원(국내총생산·GDP 대비 41.0%)까지 불어날 정도로 나랏빚이 늘고 있다.
세출 10% 감축과 별도로 정부는 선심성 복지를 남발하는 지자체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내기로 했다. 청년수당 등 원칙에 어긋나는 복지사업을 펴거나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지자체에 교부금을 줄이는 등의 불이익을 줄 예정이다. 또 100억 원 이상의 정부 보조금이 투입되는 신규 보조사업에 대해서는 적격성 심사를 실시해 사업 타당성을 미리 평가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가 10% 재량지출 구조조정을 한다고 그만큼의 예산이 실제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서 진정한 의미의 재정개혁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있다. 예산 심의 과정에서 실제로 어떤 사업의 예산을 깎고 무슨 예산을 늘렸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공개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감축한 예산을 꼭 필요한 데 쓰겠다’는 약속이 선언적 구호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을 통해 확보한 14조 원 안팎의 재원을 일자리 사업 등에 집중 투입한다는 게 정부 계획이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줄곧 일자리 최우선 기조를 지켜온 상황에서 지난 3년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는 게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국책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현 정부 들어 매년 초반에는 재정개혁의 고삐를 조일 것처럼 나오다가 기획재정부 심의, 국회 논의 등을 거치며 용두사미로 끝난 게 현실”이라며 “결국 예산 심의 및 확정 단계에서 이뤄지는 의사 결정이 재정개혁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 “복지 구조조정 등 근본적 재정개혁 필요”
정부가 재량지출 10% 구조조정이라는 칼을 빼들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만으로 재정건전성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선거 때마다 앞다퉈 각종 선심성 복지공약을 내놓으며 재정건전성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스스로의 씀씀이만 줄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올해 예산을 보면 세출 구조조정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올해 예산 386조4000억 원 중 누리과정, 기초연금 등 정부가 손을 대기 힘든 복지 지출만 83조1000억 원에 달한다.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내놓은 장기 재정 전망에 따르면 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은 올해 8.1%에서 2060년에 15.5%까지 높아진다. 그나마 현행 정부의 복지사업을 늘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추계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4·13총선에서 대규모 예산이 투입될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기초연금 30만 원 지급 △미취업 청년 구직자에게 취업활동비 60만 원 지급 등 2021년까지 총 147조9000억 원이 들어가는 공약을 내놨다. 새누리당도 △저소득층 건강보험료 부담 완화 등 2020년까지 56조 원이 필요한 공약을 발표했다. 국민의당도 111개 공약 실현을 위해 5년간 46조2500억 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근본적인 재정개혁을 위해서는 정치권의 포퓰리즘 공약을 검증할 장치를 만드는 한편 정부가 손을 대지 않고 있는 복지 등 의무지출 구조조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완규 중앙대 교수(경제학부)는 “재량지출을 줄이는 재정개혁은 한계가 있을뿐더러 자칫 경제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복지지출 등 의무지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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