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1152km 대사 → 20km 원장 → 500m 실장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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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천막당사’ 이병기 실장]


《 주일본 대사(2013년 5월)→국가정보원장(2014년 6월)→대통령비서실장(2015년 3월). 요즘 대한민국 정가에서 가장 ‘핫(hot)’한 남자 이병기 실장이 걸어온 최근 3년의 행로(行路)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서울∼도쿄(東京)가 1152km, 청와대와 국정원이 20km 정도 떨어져 있고 청와대 내 대통령집무실과 비서실장 집무실 간 거리는 500m다. 매년 박근혜 대통령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이 실장은 이제 최고 권력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 이 모든 것이 박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 권력과의 거리가 힘을 재는 유일한 척도라면 이 실장은 현 정부 최고의 실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일보는 이 실장을 가장 잘 아는 측근 인사들을 연쇄 접촉해 이 실장이 걸어온 길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추적 취재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의전비서관 신분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를 만난 이후 27년 동안 직간접적으로 교류해 온 정치적 인연의 기록이기도 하다.

청와대 내에서는 이 실장이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박 대통령이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참모들의 진언에 무반응으로 일관하거나 ‘노(No)’라고 하는 일이 많았던 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해외 순방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 등 외생변수가 있었지만 지지율도 40% 후반대의 회복 조짐을 보이는 등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이병기 효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朴의 초대 주일대사가 된 속사연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 대선캠프에 관여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병기 실장이 국정원장 또는 대통령비서실장에 지명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박 대통령의 신임 정도로 보나 연륜, 과거의 경력으로 볼 때 두 자리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 하지만 박 대통령의 선택은 주일 대사 자리였다.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되기 전부터 외교통일 분야에는 양대 전문가 그룹이 관련 분야 정책을 조언해 왔다. 최대석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장이 이끄는 팀과 이 실장이 이끄는 팀.

최대석 팀에는 이정민 한석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유현석 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홍용표 통일부 장관 후보자, 진창수 세종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등이 포진했다. 이병기 팀에는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 이정훈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등이 활동했다.

두 갈래로 나뉘었던 팀은 2011년 박 대통령의 포린어페어스 9·10월호 기고 ‘새로운 한반도를 향하여(A New Kind of Korea)’를 계기로 최대석 팀으로 사실상 통합됐지만 이 실장은 여전히 외교통일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 이 실장의 소개로 박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후 박 대통령과 외교통일팀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 실장이 해외 출장 중인 동안 박 대통령이 윤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해 독대를 한 뒤 만남이 자주 이뤄진 것으로 안다”며 “이후 박 대통령 대선캠프 외교분과위원장 자리에 윤 장관이 올랐다”고 말했다.

2013년 주일 대사 초대 주일본 대사로 임명된 이병기 실장이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부인 심재령 여사(오른쪽)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13년 주일 대사 초대 주일본 대사로 임명된 이병기 실장이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부인 심재령 여사(오른쪽)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후 윤 장관은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초대 외교부 장관에 올랐고 이 실장은 2013년 5월 주일 대사로 부임하기 위해 ‘대한해협’을 건넜다. 이 실장 측에서는 윤 장관이 당시 인사에 ‘모종의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스가 관방장관과 형제애를 맺다

‘자의 반 타의 반’ 일본에 간 셈이지만 재임 1년 동안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넘버 2로 한국의 대통령비서실장 격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과는 문자 그대로 ‘특수 관계’를 맺었다. 부임 이후 거의 매달 오찬을 함께하며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2013년 12월 16일 저녁 자리는 ‘형제애’를 느낀 둘 사이에 핫라인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미나토(港) 구의 한국대사관저에 나란히 앉은 둘은 못살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다. 일본 북서부 아키타(秋田) 현의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스가 장관은 고교 졸업 후 도쿄로 상경해 골판지 공장에서 일했다. 2년간 돈을 모아 호세이(法政)대 법학부에 진학했지만 학비를 대기 위해 경비원, 식당 종업원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이후 샐러리맨을 하다 아는 사람의 선거 운동을 도운 게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이 대사도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가세가 기울었다. 장마철만 되면 물에 잠기던 서울 노원구 일원 판잣집에서 학교 다니던 얘기부터 입주과외로 생계를 꾸리던 대학 시절까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얘기는 끝이 없었다.

2014년 국정원장 2014년 6월 국가정보원장에 임명된 이병기 실장이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14년 국정원장 2014년 6월 국가정보원장에 임명된 이병기 실장이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지난해 6월 이 대사가 국정원장에 지명되자 제일 기뻐하면서도 아쉬워했던 사람도 스가 장관이었다. 즉각 기자회견을 열고 “매우 훌륭한 분이다. 새로운 자리에서 성공하길 바란다”는 성명을 냈다. 지난달 27일 이병기 원장이 이번에는 대통령비서실장에 내정되자 직접 전화를 걸어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했다고 한다.

일본인의 마음을 얻다

이 실장이 처음 대사로 부임했을 때부터 일본 정부는 그를 특별하게 대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은 이 대사와의 상견례를 겸한 만찬 자리에 사무차관과 아시아대양주국장 등 핵심 당국자를 대동하기도 했다. 한일 관계가 최악의 국면에 떨어진 가운데 이 대사를 일본과 박근혜 대통령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파이프라인’으로 간주했기 때문.

동일본 대지진으로 지진해일(쓰나미) 피해가 심각했던 미야기(宮城) 현 이시노마키(石卷) 시를 방문했을 때도 의례적인 보여주기 행사로 치부하지 않았다. 가설주택을 방문해 노인들과 삼계탕을 같이 끓여 먹고 대사관 입주식 때는 현지 주민 대표도 초청했다. 2013년 12월에는 현지 고교생 14명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청소년 통신사절단’을 꾸리기도 했다.

차곡차곡 정이 쌓이자 처음엔 건조하게 대하던 주민들도 어느새 이 대사의 팬이 됐다. 2014년 4월 16일 이시노마키를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는 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환영했다.

그는 또 주일 대사로는 사상 처음으로 2013년 12월 20일 일본인 납북 피해자의 상징적 존재인 요코타 메구미(橫田惠)의 부모 등 피해자 가족 5명을 도쿄 시내 피해자 가족 사무소에서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사는 가족들의 사정을 들은 뒤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2014년 설에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떡과 함께 “한국에서는 설날에 가족들이 모인다. 자녀들이 하루빨리 가족 품에 돌아오길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다.

미묘했던 윤 장관과의 관계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는 내지 못했다. 오히려 한일 관계는 전후 최악이라는 평가가 대세다.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박 대통령의 원칙 외교와 아베 총리의 역사 수정주의적 움직임이 대립하는 가운데 주일 대사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지만 이 실장의 귀국 길은 그리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한일 관계는 이 대사가 취임하기 전에 이미 파탄 직전의 상황이었다. 2013년 2월 박 대통령 취임식 특사로 방한한 아소 다로 부총리가 미국 남북전쟁을 거론하며 “북부에서는 ‘시민전쟁’으로, 남부에서는 ‘북부의 침략’으로 가르친다. 같은 국가, 민족이라도 역사인식은 일치하지 않는데 다른 나라 사이에야 오죽하겠는가”라고 했다. 화가 난 박 대통령은 그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이 가해자라는 입장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맞불을 놨고, 아베 총리는 한 달 뒤 “침략의 정의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며 일본의 침략을 부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결국 아베는 그해 12월 취임 1주년을 맞아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전격 참배하면서 한일 관계에 결정타를 날렸다. 박근혜 대선캠프 출신의 한 인사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치고 있던 이 실장으로서는 회복 불가능한 핵 펀치를 맞은 셈”이라며 “공교롭게도 윤병세 장관은 박 대통령 임기 초반 초강력 대일 대응기조를 진두지휘했다”고 말했다.

2013년 4월 아소 부총리 등 일본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직후 윤 장관은 일본 방문을 전격 취소했다. 당시 윤 장관은 “내가 개인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 정도의 결정권은 있다”며 외교 분야 ‘원톱’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대사 재임 시절 이 실장은 외교부 본부에 대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잘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에서 죽어라고 애를 쓰는데도 서울에서 보조를 맞춰주지 않아 성과가 나지 않는 점에 대한 비판이었다.

‘내곡동 7개월’에 대한 평가

이 실장은 주일 대사 시절 대통령국가안보실장 자리를 두 차례 고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안보는 군(軍) 출신 인사가 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 국정원장 자리도 거절하기는 했지만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이 워낙 다급하게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내일 박 대통령이 국정원장 지명을 발표하겠다”는 식이었다고 한다.

전격적으로 국정원장에 오른 이 실장의 7개월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편이다. 국회 정보위원회 새누리당 간사인 이철우 의원은 “정치 관여에 대한 의혹을 불식하고 야당을 다독이면서 잘 관리했다”며 “한마디로 하면 ‘무난했다’고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본인을 포함한 국정원 전 직원의 정치 불(不)관여 서약을 이끌어낸 점을 평가한다는 것. 이 의원은 “다만 국내 안보수사나 대테러 분야에서는 실력을 발휘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며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던 측면도 있다”고 했다.

야당 간사인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전임 원장과 달리 말이 통했다”며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고소·고발된 인사에 대해서도 우리 성에는 차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조치를 취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정윤회 비선(秘線) 실세’ 논란 당시 자칫 국정원으로 불똥이 튈 만한 상황을 무마한 것도 이 실장의 정치력에 힘입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비서실장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2015년 비서실장 집권 3년 차를 맞은 박근혜 대통령과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의 물리적 거리는 500m. 주일본 대사 시절 대한해협을 건너 1152km 거리에 있다가 국가정보원장이 되면서 20km 반경에 들어온 뒤 이제는 문자 그대로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실세 중 실세가 됐다. 1일 중동 4개국 순방길에 오르는 박 대통령을 경기 성남 서울공항으로 배웅하러 나온 이 실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박 대통령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동아일보DB
2015년 비서실장 집권 3년 차를 맞은 박근혜 대통령과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의 물리적 거리는 500m. 주일본 대사 시절 대한해협을 건너 1152km 거리에 있다가 국가정보원장이 되면서 20km 반경에 들어온 뒤 이제는 문자 그대로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실세 중 실세가 됐다. 1일 중동 4개국 순방길에 오르는 박 대통령을 경기 성남 서울공항으로 배웅하러 나온 이 실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박 대통령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동아일보DB
이 실장의 성공을 점치는 사람들은 그가 ‘과거’에 보여준 면모를 보면 절대로 권력을 남용하거나 호가호위(狐假虎威)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때로는 직언을 할 수 있으며 여야 정치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기춘 전 비서실장 때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이 실장과 20년 이상 교류해 온 한 인사는 “2012년 10월 치열한 대선 레이스가 펼쳐질 때 인혁당, 정수장학회와 관련한 박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이 됐을 당시 ‘두 문제를 확실히 매듭짓고 가야 한다’고 진언한 사람이 바로 이 실장이었다”고 했다.

1998년 안전기획부 2차장을 끝으로 야인 생활을 하던 이 실장은 2004년, 2012년 박 대통령이 사실상 공천권을 행사할 때 비례대표직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스스로 나서서 자리를 요청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 실장의 비서실장 성패의 요체는 청와대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의 관계 설정에 달려 있는 것 아니냐(신경민 의원)는 지적이 많다. 비서실장 역시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일 뿐인데 ‘주군’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말도 들린다.

하태원 triplets@donga.com / 도쿄=배극인 특파원·배혜림 기자
#천막당사#이병기#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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