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甲도 언제든 乙 될 수 있다

권기범 기자 , 김현수 기자 , 김호경 기자 입력 2014-11-04 03:00수정 2014-11-0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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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에 뿌리박힌 갑을관계 (下) 이렇게 뿌리 뽑자 《 “영원한 갑을관계는 없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갑을관계는 상황에 따라 역전되거나 달라진다. 중소기업 사장에겐 절대 ‘갑’인 대기업 임원도 공권력 앞에서는 약자가 된다. ‘손님을 왕처럼 대한다’는 백화점 판매원도 자신이 사는 아파트 경비원에게는 ‘갑’으로 군림한다.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갑을관계의 악순환을 끊는 해법은 무엇일까. 한때 ‘갑’이었다가 지금은 ‘을’이 된 이들의 경험담에서 그 해답을 찾아봤다. 》  
○ “나도 갑이었습니다”

물티슈 제조 중소기업 우일씨앤텍의 이상업 부사장은 10년 동안 대기업 계열사인 유통회사에 다녔다. 이 부사장은 당시 자신이 ‘슈퍼 갑’이었다고 회상했다.

초임 과장 시절 그는 납품업체로부터 구입한 물건 가운데 팔리지 않은 물건을 강제로 반품시켰다. 그는 “재고 처리를 하는 게 원칙이지만 실적 욕심에 재고 부담을 납품업체에 떠넘겼다”며 “이때가 내 생애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과거 철없던 제 행동을 뒤늦게 후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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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의류 브랜드를 거느린 대기업에서 퇴직한 뒤 2005년부터 편의점을 운영하는 강모 씨(57)는 대기업에 다니던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 매장을 돌며 실적 관리를 했던 강 씨는 매장의 실적을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할인 행사를 강요하거나 신제품이 출시되면 할당량을 정해 채우라고 강요한 적이 많았다”며 “그렇게 해서라도 실적을 높이는 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퇴직 후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업종은 달라졌지만 이제 강 씨가 본사 직원들의 눈치를 보고 실적 압박을 받는 점주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내게 머리를 조아리던 점주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잘못된 행동으로 상처를 준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 당신도 언젠가는 을이 됩니다

한때 ‘갑’이었다가 ‘을’이 된 이들은 계약상의 갑을관계가 부당한 권력관계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을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우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카드회사의 입사 4년 차 영업사원인 김모 씨(29)는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갑의 달콤함을 맛보았다. 대학 학생회 간부이던 김 씨는 당시 연간 1억 원에 달하는 학내 복지사업권을 쥐락펴락했다. 이 사업권을 따내려는 업체들로부터 값비싼 식사를 대접받는 것은 기본이고 매번 동아리 수련회(MT) 비용도 지원받았다. 행사비 명목으로 수백만 원을 지원받기도 했고 겨울이면 스키장도 무료로 다녀왔다.

김 씨는 “작은아버지뻘인 업체 직원에게 사업 제안서의 형식과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기도 했다”며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난 진상 고객들이 과거 내 모습 같아 부끄러웠다. 갑을의 심정을 모두 잘 알고 있어서 이제라도 나쁜 ‘갑’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지방의 한 백화점에서 스포츠 브랜드 매장들을 관리하는 매니저 정모 씨(29)는 입점 업체들을 돌며 매출을 올리라고 독려하는 일을 한다. 나이는 어렸지만 백화점 본사 직원인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입점 업체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 홈쇼핑 업체의 온라인 쇼핑몰 바이어를 만나면서 갑에서 을로 추락했다. 온라인 쇼핑몰 매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방 백화점의 특성상 “제품 가격을 더 낮추라”는 온라인 쇼핑몰 바이어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 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백화점 마진의 절반을 온라인 쇼핑몰에 넘겨야 했다”며 “그제야 내가 ‘갑질’을 했던 입점 업체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 을도 바뀌어야 한다

‘갑’이었던 ‘을’들은 ‘을’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공공기관 출신 중소기업 사장인 최모 씨(48)는 “갑의 횡포를 막으려면 을의 경쟁력을 높이는 게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지나친 개입은 기업 간 거래를 얼어붙게 하거나 거래처가 납품업체에 피해를 떠넘기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고 갑이 자발적으로 개선하길 기대하는 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실효성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중소기업이 틈새시장을 개척하거나 경쟁력을 높여 ‘갑’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을’이 되는 게 가장 현실적이면서 근본적인 해법”이라며 “갑을관계에서 비롯된 권력관계가 특히 강력한 산업 현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어떠한 제도가 생기더라도 결코 ‘갑’의 횡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부당한 갑의 횡포를 겪게 되면 이를 신고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창구를 활용하라는 조언도 있다.

대기업 출신인 이상업 부사장은 “비교적 젊은 초임 대리나 과장들의 갑질이 심한 편”이라며 “이럴 때에는 임원들이랑 만나 얘기하면 풀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현장 직원들의 횡포를 직접 맞대응하기보다는 고위급 직원을 통해 해결하거나 거래처의 윤리경영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옴부즈만 제도를 적극 이용하면 갑의 횡포를 줄일 수 있다는 조언이다.

또 이 부사장은 침묵하는 ‘을’의 자세에 대해서도 따끔한 충고를 했다. 그는 “불편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으며 굴욕적인 자세를 계속 유지하면 그게 관행이 된다”며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김호경 whalefisher@donga.com·김현수·권기범 기자
#갑#을#골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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