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죽은 비날론’으로 경제 살려보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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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년만에 공장 재가동
1983년 100억달러 투자
나일론보다 경쟁력 낮아
北경제 파탄 상징물 전락
‘민심 잡을 카드 이것밖에…’
“원자탄 쏜것 같은 사변” 선전

“새로운 원자탄을 쏜 것 같은 특대형사변” “인공위성이 단번에 몇 개나 날아오른 것 같은 놀라운 소식”.

북한 언론들이 함경남도 함흥시 ‘2·8비날론연합기업소’(이하 2·8비날론) 재가동 소식을 전하면서 한 표현들이다. 이 공장에서는 1961년 처음으로 비날론을 양산했다. 재가동 축하대회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까지 참석했다. 지방에서 열린 군중대회에 김 위원장이 참석한 것은 이례적이다. 북한이 공장 하나의 재가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비날론으로 망했던 북한

1983년 김일성 주석은 평안남도 순천에 연산 10만 t 규모의 비날론 공장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주민들은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선전을 10년 가까이 귀 아프게 들었다. 전국의 사무실에 얼마나 잘살 수 있는지를 수십 개 항목으로 보여주는 도표까지 내걸렸다.

그러나 100억 달러를 투자한 이 공장은 1989년 1단계 공사를 끝낸 뒤 건설이 중단됐고 거대한 고철더미로 전락했다. 김 주석이 승인했다는 이유로 겨우 실험실 규모에서만 성공시킨 ‘산소열법’이라는 생산 공법을 수많은 과학자의 반대를 묵살하고 무리하게 대형 공업화한 것이 대실패의 원인이었다.

결국 공장 설비들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기간에 중국에 고철로 몰래 팔렸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약 70억 달러를 투자한 ‘남포갑문’, 약 40억 달러를 투자한 1989년의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과 더불어 1990년대 초반 북한 경제를 파탄시킨 대표적 상징물이 됐다.

○ 다시 꺼내든 비날론 카드

그랬던 북한이 비날론을 다시 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산 5만 t에 불과한 2·8비날론이 재가동하면 북한 경제가 비약할 수 있을까. 결론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비날론은 생산과정에서 막대한 전력과 석탄을 소비하기 때문에 나일론 등 다른 합성섬유와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의 현재 전력과 석탄 생산 형편을 고려하면 2·8비날론의 정상가동은 매우 어렵다. 설사 정상가동이 된다 해도 해외 판로 개척이 쉽지 않다. 이 공장은 1961년부터 1994년까지 정상가동됐던 기간에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북한이 이 공장의 재가동을 원자폭탄과 인공위성에 비교하며 대대적인 선전에 나선 것은 역설적으로 화폐개혁 후유증과 식량난으로 인한 민심 동요를 다잡을 카드가 그만큼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북한은 ‘2012년까지 강성대국을 건설해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주택 문제를 풀겠다’고 선전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2·8비날론의 재가동과 평양의 10만 채 아파트 건설이 입는 문제와 주택 문제를 풀었다고 선전할 유일한 호재이다.

하지만 비날론은 주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던 전례가 있다. 이번에도 2·8비날론이 얼마 안 가 정상가동을 못한다면 비날론에 대한 찬양이 당국에 악화된 민심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으로 보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비날론

한국인 이승기 박사가 1939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한 합성섬유. 석유계열의 나일론보다 2년 늦게 나왔다. 석유를 원료로 한 합성섬유 나일론과 달리 비날론은 석탄계가 주 원료다. 북한은 6·25전쟁 때 월북한 이 박사의 연구를 바탕으로 1961년 함흥공장에서 비날론을 처음 생산했고 ‘주체섬유’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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