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5·16은 진보세력 봉기’ 평가 이틀뒤 ‘반동 쿠데타’ 뒤집어

  • 입력 2009년 10월 16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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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보, 당시 北 등 4개국 주재 中대사관 외교문서 입수

○ 5·16 이전 예측
“장면 정권에 대한 불신 깊어 군부 내 반란 일어날 수도”

○ 5·16 당일
부대이동 현황 등 손바닥 보듯
“박정희 소장 한때 남로당 연계 美사주 아닐 가능성 90%”

○ 5·16 이틀뒤
‘반공’ 국시에 충격 받은 듯
“美에 의해 기획된 것” 규정

전쟁의 포성이 멎은 뒤 남북이 치열한 체제 대결로 나아가던 1961년 남한에서 발생한 군사쿠데타를 보고 북한은 위기의식과 함께 대남 적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는 평가를 동시에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본보가 우드로윌슨센터를 통해 입수한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 등의 전문 8건은 숨 가쁘게 진행된 5·16군사정변의 막전막후를 지켜보는 북한의 복잡한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다. 쿠데타 발생 직후 남한 내 ‘진보세력’의 군사정변이 아닌가 하는 기대 섞인 심정으로 바라보던 북한은 이내 박정희 소장이 중심이 된 쿠데타 세력에 대해 반동괴뢰라는 평가를 내린다.

특히 북한은 쿠데타 세력의 군부대 이동 현황과 각 도시 장악 현황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도 눈에 띈다. 남한 내 간첩과 지하당 조직의 정보가 북에 즉각 보고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북한은 결국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려던 애초의 계획을 철회하고 1차 7개년 경제계획 대신 국방-경제 병진(竝進) 노선이라는 군사력 강화의 길을 걷는다.

중국대사관의 전문은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포함해 류샤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린뱌오(林彪), 덩샤오핑(鄧小平) 등 당시 지도부에 전해졌으며 외교, 국방, 중앙선전부, 군사정보부 등 주요 외교안보 부처에도 직보됐다.

▽북한의 남한 상황에 대한 평가=북한은 5·16군사정변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장면 정부 아래에서 전개되고 있던 정치 사회적 혼란을 예의 주시하면서 상황 평가를 하고 있었다. 1961년 3월 31일자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이 본국으로 타전한 전문의 주요 내용에 따르면 일단 남한에서 대규모 대중투쟁이 발생하더라도 장면 정부를 전복할 정도는 아니라는 총평을 내렸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남한 내 지하당 조직을 통해 남측 내 각 도시의 시위 상황과 시위 주도자 및 정치세력에 대한 역량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김일성 수상은 남한 내 동향을 종합한 비밀보고에 의거해 “남한의 굶주린 농민과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특히 중요한 것은 군부 내의 반란 가능성”이라고 언급한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전문은 남한 내 지하당 조직의 분석을 근거로 “남한 주민의 장면 정권에 대한 불만이 아직 이승만 정권에 대해 가졌던 증오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특히 북한은 남한 내에서 미군이 철수하지 않고, 또 강력한 정당 지도자가 출현하지 않는 한 남한에서의 전반적인 정세가 결정적인 투쟁 수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더불어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은 북한이 “당시 남한 국민들의 반(反)장면-반미 통일투쟁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거나 강화될 경우 1961년 4월 중 새로운 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음을 전했다.

▽군사쿠데타 가능성 예견=북한은 장면 정권의 전복은 군부 내 ‘애국세력’이 등장하고 민중봉기의 역량이 강화되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또 군부 내 애국세력은 그 지도력이 상당히 강하며 이른바 ‘장면 도당’의 억압에 의한 대중봉기 진압작전에 투입된다면 일부 군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자발적 반란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미군이 한국군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도 군부가 독자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내다본 셈.

▽진보냐 반동이냐?=그러나 막상 쿠데타가 발생하자 북한은 군사쿠데타 세력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다소 애를 먹은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은 쿠데타 발생 직후 미국이 그들의 ‘파시스트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쿠데타를 사주한 것으로 추측했지만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셜 그린 당시 주한 미국대리대사가 장면 정권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것을 본 뒤 미국의 사주가 아닌 독자적인 쿠데타 쪽으로 무게를 실었다.

1961년 5월 16일 전문은 이번 쿠데타가 육군본부의 명령이 아닌 박정희 소장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며, 그는 군부 소장파로부터 신망을 받고 조직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전문은 박정희 소장이 한때 남로당원이었다고도 적고 있다. 결국 북한은 박정희 소장이 군부 내 파벌갈등 차원에서 현 상황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이 시점에 북한은 “미국의 사주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틀 뒤인 18일 “미국에 의해 기획된 것”이라며 쿠데타 세력을 반동으로 규정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남로당 출신 황태성 남파

박정희 직접접촉 지시

사형시키자 관계 악화

■ 5·16 이후 남북관계

남한에서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북한의 내부 상황을 담은 중국 외교문서들은 ‘적대적 상호의존’이나 ‘분단체제론’ 등의 개념이 말하는 것처럼 분단 구조 속에서 남북한의 정치가 서로 맞물려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남한 요소’가 북한 국내정치를 변화시킨 실증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외교문서가 보여주는 사실은 세 가지다. 첫째, 북한은 5·16군사정변이 발생하기 전부터 장면 정부 아래서 전개되던 남한의 정치 사회적 혼란을 예의 주시하면서 나름대로 사태를 판단하고 평가를 하고 있었다. 둘째, 당시 김일 부수상은 정변 당일 이를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했다가 이틀 만에 정변에 대한 평가를 180도 바꿨다. 셋째, 북한은 남한의 정변에 대한 충격으로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을 2년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경제의 민간부문보다 군사부문을 우선하는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시작했다.

한편 이번 문서에는 나타나지는 않지만 1961년 5월 18일 노동당 중앙위 상임위원회 회의 이후에도 김일성 수상은 잠시 동안 박정희가 정변을 일으킨 진의가 무엇인지 확인하려 했다. 그는 박정희가 광복 후 1948년 여순반란사건 이전까지 남로당 당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남로당 출신의 황태성을 남한에 급파해 박정희를 만나게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그해 10월 황태성을 검거해 사형시켰고 이 일로 남북관계가 악화됐다.

아무튼 당시 북한이 ‘반공’을 국시(國是)로 표방한 5·16군사정변 세력에 대해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명하며 진의를 파악하고 접촉을 꾀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신종대 북한대학원대 교수 shinjd@kyung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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