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계 인사들이 전하는 ‘내 기억속의 DJ’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8월 19일 02시 56분



수첩에 항상 메모 어딜가든 책 챙겨
정적과 대화-타협 소통의 리더십 보여
“의원회관서 밤늦게 바둑두는 모습 보고
혈세받고 뭐하냐며 호통”

○ 한광옥(전 대통령비서실장)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여러 고통을 겪어서인지 인내심이 대단했다. 욕설이 나올 만한 상황에서도 “에이” 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게 전부였다. 1년에도 몇 권씩 쓴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의 메모, 좋은 정보나 문장을 담은 신문기사가 오려져 붙어 있었다. 감성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아 TV를 시청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 박선숙(전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민주당 의원)
매우 꼼꼼하고 성실한 분이었다. 틈 날 때마다 “정치인은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모든 문제에 답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느냐’고 묻자 “관심을 갖고 일하다 보면 답을 갖게 된다”고 했다. 또 “정치인이 만나는 첫 번째 국민은 언론”이라며 늘 모든 조간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 이윤수(전 민주당 의원)
치밀하고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10년 넘게 동교동에서 비서로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디를 가든지 책부터 챙기는 등 공부가 생활화돼 있는 분이었다.
○ 이만섭(전 국회의장)
정치부 기자 시절 1961년 5월 실시된 강원도 인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를 담당하면서 야당 후보였던 DJ와 가깝게 지냈다. 어찌나 열성적이었는지 사흘 뒤 발발한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잃었을 땐 기자들도 가슴 아파했다. 6대 국회 때부터는 의정활동을 함께했는데 사카린 밀수 사건 등 대형 사건 때나 국정감사 때마다 예리한 송곳 질문을 퍼붓던 맹렬한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김상현(전 민주당 의원)
1980년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이었다. 군사정권에서 내세운 한 재일동포가 법정에서 “DJ는 간첩이다”라고 외치자 나도 “이 날강도 같은 놈들아”라고 되받았다. 재판이 중단돼 법정을 나오는데 DJ가 내게 “김 동지, 한 건 했군”이라고 하더라. 최악의 상황에도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 분이었다.
○ 이훈평(전 민주당 의원)
DJ는 머리 좋은 사람보다 성실한 사람을 높이 평가했다. 평민당 시절 밤 12시 넘어 퇴근하다 의원회관 한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자 누구 사무실인지를 알아보도록 했다. 평민당 A 의원이 B 의원과 바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DJ는 “왜 국민 혈세로 운영하는 의원회관에서 전등을 켜고 바둑을 두느냐”고 역정을 냈다. A 의원은 다음 총선 때 공천을 받지 못했다.
○ 홍사덕(전 신한민주당 대변인·한나라당 의원)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끈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남북관계에 있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사명감을 갖고 기초생활수급제 등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건국 이래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12대 국회 때 신민당 대변인 시절부터 DJ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따뜻하고 섬세한 분이었다.
○ 김무성(상도동계·한나라당 의원)
혹독한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 없는 도전과 응전을 통해 꿈을 이룬 분이다. 정적(政敵)과도 끊임없이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는 진정한 정치인이었다. 정치가 실종된 지금의 정치권은 DJ가 보여줬던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 희망의 정치를 되새겨볼 필요가 많다.
○ 임동원(전 국가정보원장, 전 통일부 장관)
숱한 생사고비를 넘기면서도 단 한 번도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민주통일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헌신한 분이었다. 내가 아는 DJ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였다.
○ 김명자(전 환경부 장관)
장관 시절 국무회의 때 대통령의 지적사항, 지시사항 등을 나중에 옮겨 적어보면 고칠 대목이 없는 문장이 됐다. ‘토씨 하나까지 그냥 쓰는 일이 없구나’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일이 많았다. 연두보고를 할 때에도 “소신껏 하세요” “규제완화에 중점을 두면 됩니다” 정도의 당부만 했다. 그 대신 주로 듣고 끊임없이 메모를 했다. 따뜻하고 자상한 분이었다.
○ 윤공희(대주교, 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1964년 박정희 정권 시절 천주교 주교들과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들이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첫 인연을 맺었다. 활력이 넘치는 젊고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당시 김대중 의원이 국회에서 의사일정을 끌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인데 의원발언으로 무려 5시간 이상을 끌었다. 그러나 억지로 시간을 끄는 것 같지 않고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내용이었다. 당시 참석자들이 웅변가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 손숙(전 환경부 장관·연극인)
예술에 관심이 많아 연극 작품과 작가들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많이 안다’고 느껴질 만큼 박식했다. 언젠가 김 전 대통령 집으로 초청을 받았는데 김 전 대통령은 “얼굴이 많이 상했다. 그렇게 힘들게 연극을 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면서 용돈을 쥐여주더라. 너무 감동을 받아 울어버렸다.
○ 오정해(영화배우)
영화 ‘서편제’를 상영할 때 김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직접 보러 왔다. 영화 관람 후 김 전 대통령은 “‘서편제’를 통해 국악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론 공부도 열심히 해 대학 강단에 선다면 국악의 길이 고급스러워질 것이다. 공부하라”고 당부하더라. 인재를 키우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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