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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9월 13일 01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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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장에 직권상정 요청… 선진당 반대로 무산
추가경정예산 처리가 불발된 11일 밤과 12일 새벽 국회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은 전날에 이어 11일 오전 10시부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위원회를 열고 마라톤협상에 들어갔다. 쟁점은 정부가 요구한 에너지 공기업에 대한 가격 보전금을 민주당이 수용하느냐 여부였다.
긴 협상 끝에 민주당은 이날 오후 9시 2조9000억 원 규모의 수정안을 제시했다. 노인 틀니 보조금 지원 등 민생 예산을 끼워 넣되 공기업 보전금은 삭감하자는 것이었다.
이한구 예결특위 위원장은 “민주당이 느닷없이 간단한 목차에 금액만 써 있는 수정안을 내놓자 협상을 깨겠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예산안 항목 신설과 증액은 정부 동의가 필요한 데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 늦게 수정안을 내놔 여야가 합의한 ‘11일 추경안 통과’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 위원장이 수정안을 거부하자 민주당 소위 위원들은 모두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11시 30분경 한나라당과 선진당 위원들만 참석한 채 4조2678억 원의 추경안을 의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은 18대 국회 들어 처음으로 172석에 이르는 다수당의 위력을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의장 공관에 있던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국회로 와줄 것을 요청했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의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또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12일 0시 6분경 예결특위 전체회의를 열고 소위에서 올라온 추경안을 본회의로 넘기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당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예결특위 전체 위원(50명)의 과반수인 26명이 참석한 것으로 계산하고 추경안을 통과시켰지만 위원 교체 절차에 하자가 드러난 것이다.
한나라당은 예결특위 전체회의에 불참한 황영철 의원 대신 박준선 의원을 참석하도록 하는 사·보임 서류를 12일 0시 5분에 국회 의사과에 접수시켰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보임이 공식 확정된 시점이 0시 32분으로 확인돼 결과적으로 의결정족수를 채우지도 못한 채 추경안을 통과시킨 셈이 됐다.
민주당 조정식 원내대변인은 “예결위 전체회의의 추경안 의결은 사·보임 조치가 이뤄진 뒤 진행해야 하지만 그 전에 의사봉을 두드렸기 때문에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면서 “따라서 무효 처리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한나라당은 서둘러 예결위 전체회의를 다시 열려고 했지만 이미 산회를 선포한 뒤여서 불가능했다. 산회를 선포하면 같은 날에는 회의를 다시 열 수 없다.
이 같은 일 처리에 당황한 한나라당 지도부는 김 의장에게 직권으로 추경안을 본회의에 상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 의장은 “선진당이 동의하면 직권 상정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선진당 이회창 총재가 거부 반응을 보였다. 이 총재는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결국 한나라당은 오전 4시에 의총을 열고 추석 연휴 이후 선진당과 함께 예결특위 전체회의를 다시 열어 추경안을 재의결하기로 하고 해산했다. 거대 여당이 절차적인 하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추석 전 추경안 국회 통과’라는 민생과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통과 안될것 같아 지방에…”▼
예결위 불참 한나라 7명에 당내 비난 쏟아져
예결특위 50명 중 한나라당 소속은 이한구 위원장을 포함해 총 29명이다. 이 중 7명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불참 의원을 다른 의원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절차상 하자가 생겼다.
회의 불참자는 신성범 유기준 유승민 이계진 이진복 조원진 황영철 의원이다. 이들은 추석을 앞두고 모두 지역구에 내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진복 의원 측은 “추경안 통과가 안 될 것 같아 지역에 내려갔다”며 “주변 의원들도 ‘안 될 게 뻔하다’라고들 했다”고 말했다.
유기준 의원 측도 “선약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며 “지도부가 대기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평소에 보면 이런 경우에 무위로 그친 사례가 많지 않았느냐”고 해명했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예결특위 소속 불참자들이 이번 사태의 주범”이라며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18대 국회 예결특위가 처음으로 표결하는 날이었던 데다 추경과 관련한 긴박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어떻게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 초선 의원은 “사정을 알 만한 예결특위 소속 재선 의원들도 나오지 않았다”며 “당 차원에서 징계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표결 처리 강행에 대한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11일 오후 6시에 열린 의총에서 박희태 대표는 “(추경 안이 통과 안 돼) 설령 빈손으로 지역구에 간다고 해도 우리가 마련한 추경 예산이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안됐다고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그동안 표결 처리 강행을 시사했던 홍준표 원내대표도 이날 의총에서는 표결과 관련한 구체적인 언급을 삼갔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