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엔 쇠고기뿐…길 잃은 새정부 ‘로드맵’

  • 입력 2008년 6월 10일 03시 00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여파로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여야 관계도 악화되면서 정부가 준비했던 각 분야의 정책 과제들이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공공부문 개혁과 규제 완화 등 주요 개혁 과제는 이해 당사자의 반발이 예상되는 것들이어서 이 대통령의 지지도가 회복되지 않는 한 당분간 추진 동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핵심 정책 과제인 ‘경제 살리기’를 위한 개혁 과제들마저 발목이 잡혀 있어 민생경제 회복도 멀어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규제완화 → 투자활성화 → 일자리 창출 ‘밑그림’ 흔들

국회 FTA비준안 처리 늦어지며 국가 - 사회적 손실

경제 분야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공공부문 개혁, 기업 규제 완화 등 개혁 과제들이 쇠고기 파동에 발목이 잡혀 있다.

당초 이 대통령은 ‘공공부문 슬림화 및 효율화→규제 완화→투자 활성화→일자리 창출→경제성장’이라는 밑그림을 놓고 개혁 과제들을 준비해 왔다. 청와대는 “여론의 지지를 받는 정권 초기에 개혁 과제를 추진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총선 직후부터 본격적인 드라이브를 걸 계획이었다.

그러나 쇠고기 파동으로 연내 추진이 불투명해지고 있으며 자칫 ‘이 대통령 임기 내 완수’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경제 회생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한미 FTA는 국회에서 비준동의안 처리가 늦어지면서 국가적 손실이 커지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한미 FTA 발효가 1년 늦어지면 미국 시장의 선점 효과가 떨어져 15조2000억 원의 기회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지주회사 규제 완화, 금산분리 완화 등 기업 규제 개혁도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어 ‘규제 완화→투자 확대’의 정책 기조가 흔들리는 것도 큰 문제다.

금융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금산분리 완화는 6월 말까지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야당이 반대하고 있어 현 시점에서는 정책이 예정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됐던 부동산 취득·등록세 인하 방안이 발표되지 않고 있는 것도 정국 불안의 영향이 적지 않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방세인 취득·등록세를 현행 2%에서 1%로 낮추면 세수가 줄어든다고 반발하는 바람에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8일 발표된 ‘고유가 극복 종합대책’은 국회에서 여러 법안이 개정돼야 시행할 수 있는데 18대 국회 개원 협상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어 시행 시기가 불투명해지자 정부는 우려하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가 지연돼 경제 전반에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고, 규제 완화도 예상보다 늦어져 기업과 외국인의 직접투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어 사회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다”고 말했다.

공기업 개혁 총파업 예고에 세부계획 발표 미뤄

행안부만 40개과 폐지… 다른 부처는 눈치만 봐

정부는 공기업 개혁 계획마저도 공기업 노조가 총파업을 예고하자 움찔하며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는 국가정보원 등을 통해 인수위 시절부터 공기업 개혁 방안을 마련한 뒤 세부 시행계획까지 마련했지만 정국 상황 때문에 발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현 시점에서 공공부문 개혁을 들고 나올 경우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공무원연금제도 개선도 늦어지고 있다. 행안부는 공무원연금제도발전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6월 중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었지만 정부안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공무원연금제도발전위가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공무원 노조의 반발이 거세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이다.

정부 조직 개편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새 정부의 ‘대국(大局)·대과(大課)’ 원칙에 따라 행안부만 3개 국과 40개 과를 없애는 제2차 조직개편을 했지만 다른 부처는 눈치만 보고 있다.

‘법질서 확립’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았던 법무부도 ‘쇠고기 정국’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고 있지만 몸을 낮추고 있다. 법무부는 연초 인수위에 ‘집회에서 폭력을 일삼는 상습 시위꾼을 가려내고, 불법 시위 주동자 및 배후 조종자를 끝까지 추적해 엄단하겠다’는 방침을 보고했지만 추진 상황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기업, 단체 등이 일정 기간 무분규 무파업을 달성하면 마일리지를 부여해 형사처벌 때 감경하는 내용의 ‘준법 마일리지 제도’는 노동3권 침해 논란으로 중단됐고, 상습 시위구역 설치 방안은 아이디어가 소관 기관인 경찰에 넘어갔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공공부문 개혁과 법질서 확립을 통해 연간 1∼2%포인트 추가 성장을 하겠다는 정책 목표에도 빨간불이 켜졌다”며 “상황이 어렵다고 지나치게 여론의 눈치만 봐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영어 몰입 등 교육정책 반발 부닥쳐 추진동력 잃어

상하수도 운영 민간참여 확대도 ‘물값 괴담’에 주춤

정부의 주요 교육정책 과제인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와 ‘영어 공교육 강화’ 계획도 반발에 부닥쳐 있다.

당초 교육과학기술부는 올해 88개의 기숙형 공립고를 지정할 계획이었지만 선정 과정에서 탈락 학교들의 반발이 불거진 데다 ‘귀족학교 추진’이라는 비판에까지 직면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도 ‘영어 몰입교육’ 발표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뒤부터는 추진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교육과정 개편과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개발 등 후속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18대 국회가 개원되면 곧바로 추진할 예정이었던 교원평가제와 교육기관 정보공시제 등도 교육계의 반대와 최근 정국 상황 때문에 하반기로 연기됐다.

교과부의 한 관계자는 “교육정책은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것이 많아 정치 쟁점으로 비화할 수 있어 당분간 민감한 정책들은 보류하고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것이 내부 방침”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육학자는 “영어 공교육의 경우 반발을 막기 위해 정책연구를 남발하다 보니 예산만 수억 원이 낭비되고 있고, 고교 다양화 정책도 표류하고 있어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사교육에 더 의존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비판했다.

환경부가 국정과제로 보고한 ‘상하수도 대형화 및 전문화 사업’도 주춤거리고 있다. 환경부는 수도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자체가 맡는 상하수도 운영에 민간기업의 참여를 확대하는 내용의 ‘물산업지원법 제정안’을 4일 입법 예고하려다가 ‘물 값을 폭등하게 만들 법안’이라는 비판이 일자 계획을 미뤘다.

‘법안이 통과되면 수도사업이 민영화돼 하루 수돗물 값이 14만 원으로 폭등할 것’이라는 괴담이 인터넷에 퍼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병욱 환경부 차관은 “법안의 일부 조문이 입법 취지와 달리 오해를 낳고 있어 일단 입법 예고를 연기하고 이른 시일 내에 공청회와 토론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 전문가 제언

“신뢰부터 회복하고 리더십 발휘를”

전문가들은 “쇠고기 파동으로 산적한 정책 과제를 제때 추진하지 못하는 바람에 국가적으로 치러야 할 사회 경제적 비용이 막대하다”며 “정권 차원의 신뢰부터 회복한 뒤 개혁 과제들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김광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쇠고기 파동 이후 각종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 간의 이해를 조정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잃어버려 국가적으로 손실이 매우 크다”고 우려했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진 만큼 산적한 개혁 과제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신뢰부터 회복하는 게 급선무”라며 “대선 공약들도 무조건 추진하지 말고 국민적 동의와 이해 당사자 간 합의를 거치는 노력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쇠고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정책 과제들을 추진할 경우 오히려 부작용만 키울 수 있다”며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쇠고기 문제를 매듭짓고 신뢰를 회복한다면 개혁 과제의 추동력도 생길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관련기사]대통령 ‘주변’ 정리… 쇄신 폭 커질듯

[관련기사]“당정청 모두 인적쇄신을…이달 중순 조기 全大열자”

[관련기사]“대운하, 국민 싫어하면 하지 않는 쪽으로 결단”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