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00일]<1>국가체질을 바꾸다-대처 前 영국총리

  • 입력 2008년 6월 2일 02시 57분


성난 영국 민심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집권 초 실업률 증가와 폭동 등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긴축 기조를 고집하며 국민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영국 런던의 흑인 거주 빈민가인 브릭스턴에서 1981년 4월 발생한 폭동 당시 시위대가 거리의 차량을 뒤집으며 폭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BBC
성난 영국 민심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집권 초 실업률 증가와 폭동 등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긴축 기조를 고집하며 국민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영국 런던의 흑인 거주 빈민가인 브릭스턴에서 1981년 4월 발생한 폭동 당시 시위대가 거리의 차량을 뒤집으며 폭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BBC
《산술적 평등과 분배에 길든 사회가 경쟁과 창의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때로 ‘성장통’을 치르기도 한다. 1970년대 ‘영국병’을 앓았던 영국은 마거릿 대처 총리의 혜안과 의지로 사회적 비효율을 벗어던졌다. 반면 1995년 14년 좌파 집권을 종식시킨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연금 개혁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해 개혁의 좌초를 손놓고 지켜보아야 했다. 정권의 이념적 풍향계가 10년 만에 바뀐 한국 역시 정권 초의 현상으로선 전례가 없는 혼란을 겪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다른 나라들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본다.》

“개혁 고통 없인 영국病 치료 못한다” 국민 설득

실업급증 - 폭동사태… ‘최악 지지율’ 실각 위기까지 몰려

집권 3년만에 ‘개혁 효과’ 경제지표와 함께 인기도 반등

‘철(鐵)의 여인’으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1979년 집권한 뒤 국가 체질을 바꾸는 과정에서 심각한 도전에 시달렸다. 그를 한때 실각의 위기에까지 몰아넣은 것은 실업과 폭동이었다.

영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재정 적자를 키워 1976년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처 총리는 수십 년간 굳어진 잘못된 국가 체질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긴축정책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처 정부가 들어선 1979년 직후 영국 경제는 이전보다 더 심각한 침체를 경험했다. 실업자는 줄기는커녕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늘어 갔다. 집권 이듬해인 1980년 말 실업자는 사상 최고인 280만 명에 이르렀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부도가 났다. 대기업들도 못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보수당은 총선 때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 위에 ‘노동당은 기능하지 않는다(Labour doesn't work)’는 제목을 단 선거 포스터를 내걸었지만 이제 그 구호는 보수당 자신을 향한 비난이 됐다.

실업률은 올라가는데도 대처 총리는 긴축 기조를 고집했다. 그의 각료 중 절반 이상이 긴축에 반대했다. 경제학자 364명은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했다. 사람들은 10년 전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 정부가 실업자가 100만 명에 이르자 긴축정책에서 U턴해 버렸던 것을 상기했다. 평론가들은 대처 정부 역시 곧 U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처 총리도 집권 초 예상치 못했던 실업자의 놀라운 증가에 놀랐다. 그러나 그는 히스 정부와 달리 ‘U턴하지 않는’ 쪽에 정치 생명을 걸었다. 그는 “영국은 병에 걸렸다. 지금 치료를 위해 약을 먹었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매달 새로운 실업률이 발표될 때마다 하원에서 노동당 의원들의 따가운 비판에 직면했지만 그는 “오늘날의 실업은 이전 노동당 정부가 시행한 정책의 결과다. 생산성이 2% 떨어지는 동안 임금은 100%씩 올려주면서 영국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된 탓”이라고 맞받아쳤다.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고 선언한 대처 총리는 티나(TINA)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윽고 폭동이 터졌다. 1981년 4월 런던 브릭스턴 지역에서 시작된 폭동은 7월이 되자 리버풀 등 다른 낙후된 도시로 번져갔다. 빅토리아 시대 이래 영국에서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약탈이 일어났다. 당내 반대파와 야당은 “대처 총리가 실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 이미 예상됐던 혼란”이라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소요 사태는 당시 ‘영국 사회는 250만 명 이상의 실업자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던 분석을 확인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소요 사태에 철의 여인도 흔들렸다. 브릭스턴에서 첫 번째 폭동이 발생한 직후 그는 영국 같은 선진 사회에서 이 같은 무질서가 초래될 수 있다는 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두 번째 폭동은 리버풀의 토스테스에서 발생해 3주간 맨체스터, 버밍엄, 블랙번, 브래드퍼드, 리즈, 더비, 레스터, 울버햄프턴으로 번져갔다. 브릭스턴의 폭동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청소년도 가담했다.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대처 총리는 리버풀의 토스테스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폭동이 실업과는 큰 관련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하원에 출석해 “실업이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주요 원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폭동은 성인들이 아니라 주로 학교에 다닐 연령의 아이들이 일으켰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나아가 응석을 받아주는(Permissive) 사회를 비판하며 공격을 맞받아쳤다. 그는 ‘응석을 받아주는 관용의 사회가 문명사회’라는 노동당의 견해를 비판하며 “우리가 직면한 폭동은 영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오래전부터 시작된, 권위의 약화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폭동이 노동당 지방정부가 집권한 곳에서 주로 발생한 점을 들어 ‘노동당이 그동안 계속해온 빈민 보조금 정책이 실효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폭동 이후 여론은 더 악화됐다. 보수당의 지지도는 노동당에 뒤처졌고 새로 생긴 사회민주당에도 뒤처졌다. 보수당 의원들도 지역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도파(wet) 의원들은 정책의 변경만이 아니라 ‘총리의 변경’까지 거론하고 나왔다.

그럼에도 대처 총리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면서까지 눈속임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돈을 찍어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1981년 말 대처 총리의 지지도는 25%까지 떨어졌다. 여론조사가 실시된 이후 가장 인기 없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이 무렵이 대처의 인기가 바닥을 친 시점이었다.

1982년 1월 실업자는 300만 명까지 늘었지만 마침내 개혁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이 낮아지고 금리가 하락하자 산업생산이 활력을 찾아 경기 회복세가 뚜렷해졌다. 그의 인기도 서서히 올라갔다. 민영화된 공기업들은 높아진 재정 수익과 경영 효율을 수치로 증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때마침 터진 포클랜드 전쟁(1982년)에서 승리하면서 대처 총리는 확고한 지지를 얻어 11년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 치밀한 준비… 대처식 개혁

탄광노조 총파업 대비 수년간 석탄 비축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꼽은 첫 번째 표적은 노조였다.

1970년대 영국은 파업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나라였다. 노조는 ‘영국병’의 주 병인(病因)이었다. 그러나 대처 전 총리는 노조를 다루는 데 특히 신중했다.

노조의 특권을 없애는 노동조합법 개정은 단번에 끝내지 않고 네 차례에 나눠 단계적으로 처리했다. 파업을 위한 조합원 투표는 반드시 비밀로 하는 규정을 만들었고 기업이 비(非)조합원의 고용을 거부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노조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배상하도록 했다.

그가 가장 먼저 칼을 댄 대상은 당시 최대 노조인 탄광노조였다. 탄광노조는 앞서 1974년 총파업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유발해 에드워드 히스 내각을 붕괴시켰다.

대처 총리는 이런 탄광노조에 양보를 거듭하며 결전을 미루고 몇 년 동안 치밀한 준비를 했다. 연간 석탄생산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석탄을 비축하고, 석탄이 공급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석유를 병용할 수 있는 시설을 발전소들이 갖추도록 했다. 드디어 1984년 탄광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하자 그는 비축한 힘을 동원해 1년여를 맞선 끝에 결국 탄광노조를 무력화했다.

대학도 그의 개혁 대상이었다. 1970년대 교육장관으로 재직 중 급진파가 장악한 대학을 자주 방문한 그는 ‘겁쟁이 부총장’(영국 대학은 부총장이 실세)들이 반(反)자본주의적 문화를 조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 예산을 축소해 대학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그는 적은 예산으로 졸업생을 배출하는 방송대학(Open University)을 높이 평가했고 정부에서 돈을 받지 않는 버킹엄칼리지 같은 사립대를 바람직한 모델로 내세웠다.

한편으로 재원 조달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공영방송 체제에도 그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영국 공영방송인 BBC에 대해 ‘국민에게 무책임한 자유주의와 도덕적 상대주의를 심어준다’는 일침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정부 지원을 줄이면서 BBC가 시청료 외에 광고 등 다른 수입원을 개발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이처럼 BBC와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대처 총리에 대해 BBC가 발행하는 ‘BBC 히스토리 매거진’은 2006년 ‘그는 전후 영국 총리 중 가장 유능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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