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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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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매 중 막내인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서울 중구에서 9급 공무원으로 일하던 1972년 서독에서 일할 간호사와 간호보조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표를 썼다. 너무나 공부를 하고 싶던 그에게 서독은 ‘기회의 땅’이었다.
하노버와 함부르크 사이 윌첸 시(市)에서 일하게 된 그는 오전 6시부터 병원에서 일하며 야간대학에서 어학공부를 했다. 오후 6시면 버스가 끊기는 소도시에서 자전거로 밤길을 다니며 억척을 부렸다.
3년간의 간호보조원 계약이 끝나자 쾰른대 대학예비과정에 도전해 1등으로 졸업했고, 1975년 8월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됐다. 늦깎이 대학생은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쾰른대에서 교육학 인류학 사회학 철학을 공부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라틴어와 씨름했고, 1986년 2월 교육학 박사학위를 땄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1년 외무부(현 외교통상부)가 독일 전문가 특별채용 공고를 내자 쾰른대 강사이던 그는 새로운 삶에 도전했다. 인사위원회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은 나를 낳아주고 키워줬다. 독일은 내 정신을 채워줬다. 한국과 독일의 가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1991년 2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 통역을 시작으로 2005년 8월까지 주독일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했다. 2005년 9월 주세르비아 대사로 부임한 뒤에는 한국대사배 태권도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 알리기에 전념하고 있다.
‘유럽의 화약고’란 발칸반도에서도 가장 정세가 불안한 세르비아에서의 생활은 위험하지 않을까. 주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로 부임했지만 몬테네그로가 독립하면서 주세르비아 대사가 됐고, 최근엔 종교분쟁 지역인 코소보가 세르비아에서 독립할 정도로 그의 부임지는 격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부름을 받으면 어디든 달려가는 게 외교관”이라고 했다.
김 대사는 외국인과 결혼한 첫 여성 대사이기도 하다. 남편은 독일 유학 시절 만난 조지 헤서넌(55) 미국 세인트어거스틴칼리지 철학과 교수. 김 대사는 “남편은 영어 연설문 교정, 정세 브리핑은 물론 신간 외교서적을 모조리 구입해 보내주는 등 외조를 아끼지 않는다”며 “외교관이란 직업의 특성 때문에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남편은 방학 때마다 임지를 찾아와 일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소개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