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문화적으로 설계해야 뿌리내려

  • 입력 2008년 1월 23일 02시 37분


[새정부 문화정책 진단]전문가 3인 좌담

소설가 복거일씨 대운하는 수백년 써먹을 거대 문화기반시설

이대영 교수 각계의 전문가 만나 숙성된 문화비전 내놓길

강한섭 교수 전통의 재창조-동북아 문화 허브 전략 구사를

《정부는 2010년까지 우리나라를 세계 5대 문화콘텐츠산업 강국으로 만들겠다며 지난 10년간 매년 수천억 원의 자금을 투입해 왔다. 그러나 기초예술 분야의 창작 기반은 무너져 내리고 있고 영화 드라마 가요 분야의 한류도 꺼져 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공약집에서 ‘문화 소프트웨어가 강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했으나 신년기자회견에서는 문화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문화계에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문화정책이 안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복거일(소설가) 씨, 이대영(극단 ‘그리고’ 대표) 중앙대 교수, 강한섭(영화평론가) 서울예대 교수가 새 정부의 문화 정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 10년간 정부의 문화콘텐츠 진흥 정책을 평가한다면….

▽강한섭=노무현 정부의 정책 실패 중 대표적인 것이 문화정책이다. 정부는 지난 5년간 민간자본 등을 합쳐 5438억 원의 영상투자펀드를 만들어 영화계를 지원했다. 이 펀드의 수익률은 ―62.1%였다. 한국영화산업은 시스템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음반시장도 2000년대 초반에 4000억 원대에서 600억 원대로 주저앉았다. 정부는 역사적으로 정당하고 사회적으로 옳다는 오만한 문화의식을 내세워 문화대란을 초래했다. 문화의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문화의 다양성 차원에서도 실패했다.

▽이대영=현 정부는 문화와 예술을 공급자 중심에서 향수자와 소비자 중심으로 이동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념적 코드화에 의한 시장의 왜곡으로 나타났다. 2005년에 출범한 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인들이 문화 예술 정책과 경영에 참여하겠다는 취지였으나 각 장르에서 지분을 확보하는 싸움을 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바다이야기’ 사건에서는 공연이나 책을 구입하라고 만들어졌던 문화상품권이 도박머니로 전락하기도 했다.

▽복거일=10년 동안 문화계에도 사회주의 풍토가 휩쓸었다. 문화예산이 늘자 정부의 몫이 커졌고 시장의 몫이 줄어들었다. 문화의 기본이 되는 소비자 청중 관객 독자의 힘이 줄어들었다. 정부가 문화생산자를 직접 지원하는 정책을 펴니까 소비자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예술가와 작품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고만고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인들이 늘어났다. 지난 10년간 시인 김수영이 말한 ‘불온한 작품’은 한 작품도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강=복 선생님의 말씀 재미있게 들었다. 왜 영화 등 문화콘텐츠 시장에 정부가 많은 투자를 했는데 성장은커녕 축소됐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대답이 될 것 같다. 영화계에는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출신들이 영화진흥기구의 인선까지 도맡아 했다. 지난 정권에서 공급 주도의 정책을 편 것은 수요 창출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공급 주도의 정책은 자금을 쥔 사람에게 커다란 권력을 준다.

▽이=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탄핵 당시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를 읽고 감동받았다고 한다. 문학과 예술은 밤바다의 등대와 같다. 평상시에는 잘 안 보이고 어렵고 힘들 때 보인다. 정부는 ‘흥행예술’에만 몰두했다. 문화접대비도 마찬가지다. 누가 보기 좋은 흥행뮤지컬을 보여주지 5000원짜리 책을 사주겠는가.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강=이명박 당선인의 대선 공약집에서 문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공약을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노무현 정부의 문화공약과, 심지어 경쟁자였던 정동영 후보의 공약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문화산업 5대 강국을 만들겠다’는 것도 똑같다.

▽이=이 당선인의 통치가치가 ‘실용주의’다. 실용주의가 ‘실용외교’ 등에는 맞는데 과연 ‘실용문화’ ‘실용예술’이란 말과 어울리는가. 문화에서 실용적으로 당장 먹고살 수 있는 문화산업 분야에만 집중한다면 또다시 ‘잃어버릴 5년’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전문가와 만나 문화비전을 숙성시켜야 한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구석에 있던 사람들이 햇볕을 쬐고, 잘나가던 사람이 구석으로 가는 식의 지원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예술가들이 국가 예산을 지원받으면 언젠가는 갚겠다는 ‘부채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예술계의 도덕불감증을 해소하는 지원 및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강=이명박 당선인은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 시스템 개선을 통한 실적을 보여 줬다. 두 가지는 21세기형 공간전략(청계천)과 시간전략(대중교통 시스템)을 보여준 사례다. 문화에서도 시간전략과 공간전략을 잘 사용해야 한다. 재래의 ‘단팥죽’을 다양하게 만들어 팔아먹는 일본처럼 우리도 정보기술(IT) 등 뉴미디어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전통 소재를 새롭게 창작해 내는 ‘시간전략’, 한국을 동북아 문화콘텐츠 산업의 인재와 자본, 기술이 모여드는 허브로 만드는 ‘공간전략’을 잘 구사해야 한다.

▽복=이명박 당선인이 ‘토목전문가’일 뿐이라고 비판하는데 토목 전문가라서 문화 기반시설을 잘 만드는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한반도 대운하는 엄청난 문화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계기다. 대운하는 수백 년 써먹을 수 있는 문화기반시설인 만큼 임기 내 끝내려고 서둘지 말고 문화적인 콘셉트를 넣어 설계해야 한다. 사실상 임기 내에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경건한 자세로 잘 다듬어야 한다. 내 생전에 완공을 못 본다는 심정으로 대성당을 짓는 것처럼 말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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