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도 미완인데…버거워진 ‘합의 보따리’

  • 입력 2007년 10월 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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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선언문에 서명한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평양=연합뉴스
“합의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선언문에 서명한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평양=연합뉴스
이번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은 남북한이 지향해 나갈 행동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6·15공동선언 등 과거 남북 간의 주요 합의 이행 과정에 비추어 이번 선언의 실천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특히 합의 내용 중 개성공단 확대, 경의선 철도 및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등은 수천억 원까지 드는 사업들이어서 대통령의 의지만으로는 이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하기 전부터 “차기 정부에 부담을 지우는 합의를 해서는 안 된다”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합의는 이행 과정에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고 여러 차례 경고해 왔다.

▽기본 전제 해결 미흡=우선 남북 간 평화체제 구축과 경협 확대의 선결 과제인 북핵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6자회담이 원만하게 진행되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및 플루토늄 처리 등 과거 핵문제 해결에는 10년 가까이 걸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핵문제가 언제 장애물로 불거질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안고 남북 경협 등을 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선언을 원만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한 내에서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는데 이 문제 역시 쉬운 과제가 아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재조정 문제와 경협 확대 등에 대해 이견이 많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도 이런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 4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열린 귀환 보고회에서 “(이번 선언은) 남북기본합의서와 6·15공동선언 이행 방안에 관한 것이다. 더 나아간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음 정부에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잘 풀어 가는 토대를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쉽지 않은 군사·안보 분야 실천=이번 선언에서는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분쟁문제를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남북은 이 같은 제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1월 평양에서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장 간에 회담을 열기로 했다.

국방장관 회담에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의 방법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권한이 있다는 점에서 결국 안보 분야 합의 사항의 원활한 이행 여부는 상당 부분 국방장관 회담의 성패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남북은 2000년 정상회담 때도 국방장관 회담에 합의했지만 2000년 9월 한라산에서 한 차례 열린 뒤 7년 동안 열리지 않았다”며 “이번에도 7년 전의 전철을 밟는다면 이번 정상회담의 합의사항도 줄줄이 연기 또는 무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문제를 협의하기로 했다는 합의도 제대로 이행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소수다. 한 정부 당국자는 “답방을 약속할 수 없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립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한반도 종전 선언을 위해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을 추진한다고 했지만 언제 성사될지 예상할 수 없다. 이번 선언에도 구체적인 시한이 명시돼 있지 않고, 어떤 절차를 밟아 이 같은 역사적 이벤트를 추진할지도 불투명하다.

2007남북정상선언과 6·15남북공동선언 비교
항목2007남북정상선언6·15남북공동선언
선언 일시2007년 10월 4일2000년 6월 15일
합의 주체노무현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김대중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
선언문 합의사항본항 8개 항+별도 2개 항5개 항
주요 내용-평화체제 구축 및 3, 4국 정상회담 통한 종전 선언 실현 노력
-남북 총리, 국방장관회담 개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등 남북 경협 확대
-서울∼백두산 직항로 개설
-남북 간 인도적 사업 협력
-남북 정상 수시로 만나 현안 논의
-우리 민족끼리 힙을 합쳐 통일문제 해결
-남한 연합제와 북한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을 중심으로 통일 추진
-이산가족, 비전향 장기수 문제 조속 해결
-사회 문화 체육 환경 분야별 교류 활 성화

▽과거 합의사항 실천도 미진=6·15공동선언 발표 후 김대중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은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며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6·15공동선언 대부분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북한은 몰래 핵무기를 만들어 참여정부 출범 후 핵 실험까지 강행했다.

6·15공동선언에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을 바탕으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했지만 실제 통일문제에 대한 진전은 이뤄지지 않은 채 남남 갈등을 촉발했다. 남북 경협을 활성화하기로 했지만 이것 역시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대북 퍼 주기라는 논란을 불렀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고, 대북 송금 특검에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뒷돈을 준 사실이 드러나 비판 여론이 일었다.

6·15공동선언에 앞서 남북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라는 분단 이후 최초의 합의를 내놓은 이후 19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했지만 실천된 것은 많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남북기본합의서는 상호 체제 인정 및 존중, 내부 문제 불간섭, 정전상태의 평화상태 전환,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한 민족 전체의 복리 향상 방안 등을 구체적으로 망라한 합의로 평가받았지만 16년이 지나도록 실제 이뤄진 것은 거의 없다.

▽과거 돌아보지 않는 정부=정부는 이번 선언에 대한 구체적 평가와 여론 수렴 과정은 생략한 채 후속조치부터 마련할 태세다. 정부는 5일 오전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범정부 차원의 후속조치 및 점검체계를 가동할 계획이다. 이번 선언을 신속하게 이행해 차기 정부 들어서도 이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의지가 강한 만큼 남측의 예산이 소요되는 경협사업의 경우 임기 안에 초기 이행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내년 2월이면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이번 합의 보따리를 직접 실천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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