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그놈

  • 입력 2007년 6월 5일 03시 03분


2003년 초 참여정부 출범과 때맞춰 ‘귀여니’란 소녀 작가가 스타로 떠올랐다. 인터넷 연재소설 ‘그놈은 멋있었다’가 발간 두 달도 안 돼 20만 부 이상 팔린 것이다. 기성세대에겐 제목부터가 이해 불가능한 문화 현상이었다. 양희은 시대엔 미워도 ‘내 님’이었는데 이젠 ‘내 남자 친구’도, ‘그 남자’도 아닌 ‘그놈’이라니? 동명(同名) 영화에서 ‘그놈’은 잘생긴 탤런트 송승헌이 맡아 인터넷세대를 열광시켰다. 그들에게 ‘그놈’은 일상의 말버릇이자 징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대통령도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그놈’을 말했다. 대운하 공약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며 “그런데 그놈의 헌법이 토론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단념해야지요”라고 했다. 청와대브리핑의 발언록은 다르다. 전문(前文)에서 ‘강연 전문을 읽기 좋게 다듬어 올린다’고 전제한 뒤 “그런데 헌법상으로 토론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단념해야지요”로 고쳐 놨다. 대통령에게 ‘그놈’은 일상의 말버릇이되 애정의 표현은 아니었다는 점을 청와대도 아는 모양이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부터 시작한 대통령의 어법에 대해선 국민도 알 만큼 안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2003년 5월 21일)는 발언을 생생히 기억하는데 이번 강연에선 “금방 결단했다 해 놓고 그 다음 날 와서 ‘아이고 안 할랍니다’ 해 쌓고 그러면 안 된다”며 일관성을 강조했다. 2004년 탄핵 사태 당시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지적된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의 일관성이 여태 계속되는 건가.

▷귀여니는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그놈’이 여주인공과 결혼하는 대신 잠시 동거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유를 묻자 “그런 놈과 결혼하면 일생 망치게요?” 했다. 아무리 한때 좋았대도 그놈은 그놈일 뿐이다. ‘세계적 대통령’이 ‘신뢰성 책임성을 갖고 끝까지 언론개혁’을 하기 위해 기자(記者)를 쓰는 놈쯤으로 공식화해도 좋다. 그러나 ‘그놈의 헌법’ 발언만은 용납 못 하겠다. 대한민국 헌법을 우습게 아는 대통령을 한없이 우습게 아는 국민이 보이지 않는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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