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 들어서던 반백의 남자가 그를 보고 “안녕하세요. 별일 없으시죠”라고 인사했다.
요가에 열중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답례한다. 고건 전 국무총리다. 30여 분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가며 요가에 열중하던 고 전 총리는 넓은 목욕탕 구석의 수도꼭지 앞으로 다가가 땀을 닦기 시작했다. “10년 넘는 단골이다 보니 저처럼 일찍 오는 사람은 전용 자리가 있어요. 여기가 내 자리지.”
절제된 언행, 꾸준한 행보
고 전 총리의 하루는 10여 년 동안 거의 매일 목욕탕 출근으로 시작된다. 그는 호텔이나 피트니스클럽 사우나보다 동네 목욕탕이 더 편하다고 했다.
“서울시장 때부터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오전 5시 반이면 어김없이 오셨지.”
고 전 총리의 ‘전속’ 헤어스타일리스트인 목욕탕 이발사 이태석(57) 씨가 말했다. 고 전 총리의 철저한 자기 관리와 절제가 생활 속에 깊이 배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통령선거를 향한 고 전 총리의 발걸음도 절제돼 있다. 그러나 꾸준하다.
지난달 29일 강원 춘천시의 두산콘도에서는 고 전 총리의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는 ‘미래와 경제 포럼’ 강원지역 창립 세미나가 열렸다. 다른 유력 대선후보들이 외국 방문 등 굵직한 행사를 통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이 고 전 총리는 대구 대전 부산 광주 등을 거쳐 이날 강원을 마지막으로 전국 네트워크 구성 작업을 조용히 마무리했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한 고 전 총리는 세미나 참석에 앞서 춘천 후평공단을 찾아 민생 현장을 살폈다. 점심은 강원영상진흥원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직원들과 함께했다. 여기저기서 고 전 총리가 식사하는 모습을 찍는 직원들의 사진기 불빛이 터졌다.
“총리님 대통령 선거에 나오세요?”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던 한 여직원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할까요?”
고 전 총리는 미소 띤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어떤 질문을 받아도, 난처한 상황에 직면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다.
표현은 부드러워도 할 말은 한다
그러나 그는 예의 웃음 띤 얼굴로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그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정치인마다 스타일이 있고, 그런 다양성을 포용하는 게 민주주의 아니냐는 얘기였다.
고 전 총리의 참모들은 이런 그의 모습에 대해 “답답할 때도 있지만 신중함과 섣부른 결정은 다른 것”이라며 “오랜 국정 경험에서 나오는 신중함과 절제된 리더십이야말로 다른 후보들이 가질 수 없는 고 전 총리의 힘”이라고 말했다.
표현은 강하지 않을지 모르나 고 전 총리는 해야 할 말은 분명하게 한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29일 귀경 길, 경춘가도의 한 휴게실에서 동행한 사람들과 설렁탕으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노 대통령의 ‘임기’ 발언이 화제에 올랐다.
고 전 총리는 노 대통령에 대해 “그 사람은 ‘게이머’”라고 했다. 현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그는 어지간해서는 노 대통령에 대해 강한 표현을 쓰지 않았다. 고 전 총리는 그러면서 “국민은 결국 이미 검증된 국정 운영 능력을 평가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나 같으면 (노 대통령에 대해) ‘장난을 치고 있다’, ‘노름꾼이다’라고 했을 텐데…”라고 말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일까
한 대표는 최근 라디오 인터뷰에서 고 전 총리와의 통합 가능성에 대해 “그런 건 생각 안 하고 있다. 고건 신당은 실체도 없지 않으냐”고 말한 바 있다.
한 대표가 따지듯 묻는다. “(정기국회 끝나면) 정당을 만드신다면서요?”
12월 중순 ‘국민통합신당추진 원탁회의’를 발족시키자는 고 전 총리의 제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원탁회의에는 민주당 일부 의원이 참여할지 모른다는 말도 나오는 상황이다.
“당이라니요. 12월 정기국회가 끝난 뒤에 마음 맞는 사람끼리 대화를 하자는 거지요.”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이는 게 당 아닙니까.”
“당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한 대표께서 말씀하신 민주대통합과 같은 얘기입니다.”
고 전 총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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