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 “주한미군 분쟁지역 파견 가능” 원칙만 합의

  • 입력 2006년 1월 21일 03시 10분


한국과 미국은 19일 주한미군의 한반도 이외 지역에의 투입을 허용하는 ‘전략적 유연성’에 공식 합의했다.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부 장관은 이날 미국 워싱턴에서 제1차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를 갖고 “한국은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변화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측은 또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는 “2003년과 2004년 한미안보협력회의(SCM)에서는 ‘한국이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이해한다’는 쪽으로만 정리됐으나 이번에는 미국이 한국 입장을 존중한다는 대목이 추가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적어도 동북아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분쟁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우리 입장이 반영됐다”고 평가했다.

▽논의 과정=미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처음 제기한 것은 2003년 한미동맹미래구상회의(FOTA)에서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전 세계 미군을 신속기동군 형태로 재편해 온 미국이 주한미군도 여타 분쟁지역에 신속히 투입할 수 있도록 길을 트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한미군 감축, 용산기지 이전, 이라크 파병 등 현안 때문에 제대로 논의하지 못하다 지난해 2월 SCM 때부터 본격 논의를 시작했다.

지난해 3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한미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후 12차례의 비공개 회의 끝에 지난해 11월경 실무 합의가 이뤄졌고 이번 합의는 이를 추인한 것이다.

▽합의 배경과 전망=정부는 줄곧 세계전략 차원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문제는 한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 있는 동북아 지역 분쟁에 대한 주한미군 투입이었다.

미국은 전 세계 미군을 어느 지역이든 신속히 투입할 수 있게 한다는 군사전략에 따라 주한미군을 동북아 기동군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 왔으나 한국은 대만 등 동북아 분쟁에 주한미군이 개입하면 한국도 본의 아니게 분쟁 당사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왔다.

이번 합의는 이 같은 인식차를 절충한 결과다. 세계적 차원에서는 미국의 입장을 존중해 주고 동북아에서는 우리 입장을 존중하는 식으로 ‘선언적’ 합의를 한 것. 우리 측에선 합의가 무작정 늦춰지면 주한미군 추가 감축 카드가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대비한 세부 규정이 없어 실제로 동북아에 분쟁이 발생해 미국이 주한미군을 투입하려 할 때에는 양국이 대립할 여지를 남기게 됐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이에 대해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말했다. 2004년 주한미군 3600명을 이라크에 투입한 전례에 비춰볼 때 양국이 비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신뢰를 갖고 있다는 것.

하지만 동북아 분쟁은 이라크와는 차원이 다르다. 세계전략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미국과 한반도 안정이 우선인 한국 간에 ‘국익 충돌’이 빚어질 개연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유사시 전력공백 대비책 서둘러야

한국과 미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함에 따라 양국의 군사관계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주한미군이 역외(域外) 분쟁지역에 수시로 투입될 경우 발생할 대북 억지력의 공백은 한국군이 고스란히 떠맡게 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주한미군의 입장에서는 이번 합의로 반세기 넘게 한반도에 고정됐던 ‘족쇄’를 풀게 됐다.

2003년 리언 러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이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trip wire)’ 개념을 폐기한 지 2년 만에 전략적 유연성까지 갖추게 됨에 따라 주한미군은 ‘신속기동군’으로 곳곳의 분쟁지역에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앞으로 한국군의 자국방위 책임과 역할은 더욱 커지고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이 수천 명의 지상군이나 다연장 로켓포(MLRS), 공격헬기 등 핵심전력을 한반도에서 다른 분쟁지역으로 옮길 경우 초래될 전력공백은 한국군 단독으로 메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첨단전력 도입 계획을 대폭 앞당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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