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김정일 ‘6·17’면담 이후]김정일, 왜 직접 나섰나

  • 입력 2005년 6월 20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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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은 17일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과의 회담에서 6자회담의 조건을 거론하는 등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을 직접 밝혔다. 이에 따라 북핵 문제는 해결을 위한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됐지만 정 장관이 전한 김 위원장의 발언만을 놓고 상황을 낙관하기엔 이르다는 신중론도 있다. 북한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이번 면담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키포인트들을 살펴본다.》

지난 1년 동안 6자회담 재개를 위해 국제사회가 갖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않던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서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힌 이유가 무엇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김 위원장을 움직인 동인(動因)으로는 우선 10일 한미정상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작년 6월 제안’의 유효함을 재확인한 것을 들 수 있다. 북한이 핵 폐기에 착수하면 다자안전보장, 에너지 지원, 경제제재 해제 조치를 단계적으로 밟겠다는 게 요지. 부시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1년 전과 다른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부시 대통령이 궁극적으로 북-미 수교로 해석되는 ‘보다 정상적인 관계’를 명시한 것도 김 위원장의 기대심리를 자극했을 법하다.

여기에 더해 한국 정부가 내민 ‘중요한 제안’이 김 위원장을 솔깃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제안에는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했을 경우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에 관한 파격적인 내용이 담겼다는 게 중론이다.

이 같은 당근 외에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나온 대북 메시지가 ‘마지막 외교적 노력’이라는 점을 김 위원장이 심각히 받아들였을 것이란 분석도 많다. 더 이상 버티면 미국이 정말로 ‘칼’을 뽑을 것이란 점을 김 위원장이 ‘실제 상황’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시 대통령의 ‘평화적 해결’ 원칙 표명은 대북 압박을 위한 명분 쌓기라는 해석이 적지 않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 직후 탈북자 출신인 강철환 씨를 만나 ‘북한 인권문제’를 본격 거론한 것을 심상치 않은 신호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김성한(金聖翰)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인권 문제를 거론하면 자연히 북한 체제 문제를 건드릴 수밖에 없게 된다”며 “북한으로선 국가안보보다 상위 개념인 체제안전 문제가 도마에 오르는 데 극도로 민감하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정부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중국의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한 데서도 북한은 경제봉쇄 위협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다급한 내부 사정도 한 요인이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인사들에 따르면 식량과 에너지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대화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생존물자를 지원받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美와 더 협의’ 가능할까▼

김 위원장이 6자회담 복귀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 인정과 북한 체제의 확고한 보장’은 북한이 그동안 계속 요구해 온 것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직접 이를 언급했다면 의미가 다르다. 6자회담 복귀 전에 미국으로부터 더욱 확실한 방법으로 확약을 받고자 하는 의사를 김 위원장이 분명히 밝힌 것은 그가 그만큼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체제보장도 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북한은 이를 확실한 구속력이 있는 외교문서 등의 형태로 다짐을 받으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이 이 같은 전제조건을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그동안 미국은 “6자회담 복귀에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의 면담 직후에도 미 국무부는 “김 위원장의 발언은 수사(修辭)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고려대 북한학과 유호열(柳浩烈) 교수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마지막 기회’라며 북한에 던져 놓은 공을 정 장관이 다시 받아와 미국 코트에 던져 버린 꼴”이라며 비판했다.

▼김정일 발언 뜯어보면…▼

판문점의 김정일
북한 조선중앙TV는 19일 판문점을 방문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을 담은 기록영화를 방영했다. 그러나 방송은 구체적인 방문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 조선중앙TV 촬영 연합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정부 고위 당국자는 “김 위원장이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유훈을 언급한 것은 핵 포기 의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북한이 주장하는 ‘비핵화’의 전통적인 의미는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철수 및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 철회 등을 의미해 왔기 때문에 이를 겨냥한 말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동복(李東馥) 전 국가안전기획부 특보는 “북한이 말한 비핵화는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뜻한다”고 말했다.

▽남북 정상회담 답방은=김 위원장은 “약속은 꼭 지키겠다”고 했지만 답방 시기에 대해선 “적절한 시점”이라고만 했다. 결국 김 위원장이 정 장관에게 답방 의지를 재확인한 것은 의미가 있지만 구체적 시기는 아직도 불확실한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으로서는 김 위원장이 남쪽을 답방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부담이 크고 그만큼 민감해 한다”며 “새로운 제안을 내놓기보다는 기다리는 태도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김 위원장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좋은 계절에 초청하겠다”고 밝혀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이 남북 정상회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좋은 계절’을 올가을쯤으로 보고 김 위원장의 연내 답방을 점치기도 한다.

▽6자회담 7월 가능성은=김 위원장이 직접 7월이란 말을 언급한 것은 그 자체가 상당한 진전임에 틀림없다.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은 “이젠 6자회담 재개가 중요한 게 아니라 6자회담에서 실질적 진전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며 회담 개최 자체를 낙관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는 “이번에도 미국과 할 얘기가 있다고 조건을 다는 등 기존 입장과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21일부터 열리는 남북 장관급회담 등에서 북한의 태도를 좀 더 관찰할 필요가 있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하태원 기자 l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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