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중국에 만만하게 보인 ‘죄’

  • 입력 2004년 8월 23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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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12주년(24일)을 하루 앞둔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외교통상부 청사에서는 양국관계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벌어졌다.

고구려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22일 방한한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이날 한국 취재진을 피하기 위해 청사 지하 주차장을 통해 외교부로 올라가는 숨바꼭질을 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한중수교 10주년 기념행사로 외교부는 ‘잔칫집’ 분위기였으나 이날은 딴판이었다.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실제 요즘 한국 외교관들은 사석에서 중국에 대한 배신감을 거침없이 토로한다. “한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키기 위해 중국-대만 사이에서 중국 편을 들었는데 어떻게 중국이 고구려사 왜곡으로 뒤통수를 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한 중국통 외교관은 “중국이 한국을 만만하게 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주한 중국 대사의 격(格). 초대 장팅옌(張庭延), 2대 우다웨이, 3대 리빈(李濱) 현 대사는 모두 부국장 또는 국장급이다. 반면 북한과 일본에 보내는 대사는 부부장(차관)급을 임명한다.

정부 내에선 이런 ‘외교적 수모’를 우리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는 자성론마저 일고 있다. 한 간부는 “주한 중국 대사로 부국장급이 오든, 국장급이 오든 한국 고위인사들이 너무 쉽게 만나주니까 중국측에서 굳이 대사의 급을 높일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이던 2001년에는 우리 정부가 주중 대사에 외교부 장관 출신을 보낸 반면 주미 대사에는 교수 출신의 초선 의원을 보냈다. 이 때문에 ‘원미근중(遠美近中·미국을 멀리하고 중국을 가까이한다)’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국 정치인들이 중국 고위인사들을 만나 사진 한 장 찍기 위해 벌이는 경쟁이 베이징(北京) 외교가의 조롱거리로 전락한지는 오래다.

중국이 한국을 만만하게 본다고 ‘네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만만하게 보인 것은 아닌지 중국이란 거울에 비친 한국 외교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볼 때다.

부형권 정치부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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