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대통령의 남은 시간

  • 입력 2004년 6월 14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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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있은 지 두 달, 대통령 탄핵안이 기각되고 한 달이 지났다. 탄핵은 노무현 대통령으로서야 치욕이었겠지만 그 반대급부는 불편한 섶에서 자고, 쓴 쓸개를 맛보는 와신상담(臥薪嘗膽)에 비하겠는가. 1988년 이후 어느 정권도 이뤄내지 못했던 여대야소(與大野小)를 거뜬히 이뤄냈고, 대통령 또한 스스로 발목을 잡았던 재신임 부담을 단숨에 털어버릴 수 있게 됐으니 결과적으로는 야당이 집권 2기의 멍석을 깔아준 셈이다.

그러나 멍석을 깔아준들 무엇하랴. 들리는 건 ‘경제가 어렵기는 하지만 위기는 아니다’라는 대통령 말씀이요, 보이는 건 여당의 지리멸렬(支離滅裂)이니 때 이른 복더위에 국민의 화증만 더할밖에. 6·5 재·보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지지율 또한 ‘반 토막’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 아닐 수 없다.

▼겉과 속의 ‘이중 혼선’▼

왜 이 모양이 됐는가. ‘이중 혼선(混線)’의 결과라고 본다. 하나는 겉의 혼선이요, 다른 하나는 속의(내면적) 혼선이다.

‘겉의 혼선’을 보자. 노 대통령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실제 2년 정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임기야 아직 3년8개월이 남았지만 2006년 6월 지방선거 후부터는 어쩔 수 없이 레임덕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보면, 사실상 대통령이 힘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시간은 2년 남짓 남은 셈이다. 따라서 그렇지 않아도 탄핵으로 아까운 두 달을 까먹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이 2년 내에 많은 일을 해야겠다고 조바심을 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국회 권력까지 얻었으니 일할 수 있는 환경도 좋다.

그러나 현실은 당정(黨政) 분리다. 당이 알아서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정동영 당의장-김근태 대표 체제를 바꿨다. 차기 대권주자들에게 입각의 기회를 준다는 명분이지만 노인 폄훼 발언 이후 당내 영남권 인사들이 마땅찮아 하는 정 의장과 ‘인정은 하지만 편치는 않은’ 김 대표를 빼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당이 돌아가길 원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당은 안정되지 않았다. 신기남-천정배 체제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의 개혁담론을 생산할 뿐 대통령과 박자를 맞추지 못했다.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에 관한 엇박자는 그 대표적 예다. 이런 혼선으로는 국정이 제대로 굴러갈 리 만무하다.

‘내면적 혼선’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다. 노 대통령은 실용주의자임을 자처한다.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말 자체는 ‘행위’를 뜻하는 희랍어 ‘프라그마(pragma)’에서 나왔다. 어원(語源)으로 보면 이론이나 추상과는 반대적 개념이다. 실제적(practical)인 방법론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종종 실제적 방법론과는 동떨어진 이분법적 인식을 거칠게 표출한다. ‘보수는 악(惡), 진보는 선(善)’이라는 식의 화법이 바로 그렇다.

이 같은 인식의 혼선은 노 대통령이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 앞장선다고 하면서도 대처와 드골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매력을 느끼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권위주의는 깨겠다. 그러나 대통령은 존중해야 하지 않느냐’는, 일견 당연하면서도 대통령 자신이 권위와 권위주의를 제대로 구분 짓지 않은 데서 비롯된 딜레마다. 상대와 장소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는 듯한 대통령의 어법도 리더십의 혼선을 자초한다.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

‘내면적 혼선’을 하루아침에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선택과 집중으로 통제하고 억제해야 한다. 말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도 선택과목이 아니라면 자제해야 한다. 자꾸 곁가지를 흔들어서야 어떻게 집중할 수 있겠는가. 예컨대 ‘연대 특강’ 같은 것은 다시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선택할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민생과 경제 살리기다. 국민이 그걸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실제적 행위로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대통령이 그렇게 하겠다면 여당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정부 따로, 여당 따로 하면서 ‘개혁 타령’ 할 때가 아니다.

이제 노 대통령에게 실질적으로 남은 시간은 2년이다. 선택하고 집중한다고 해도 짧은 시간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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