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송호근/대통령이 돌아오면

  • 입력 2004년 5월 13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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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몇 시간 뒤, 꼭 두 달의 결석을 기록하고 대통령이 돌아온다면, 총선 이후 달콤하기까지 했던 한 달의 평온은 사라질 것도 같다는 예감이 든다. 직무정지를 명한 국회도 예전의 국회가 아니고, 탄핵으로 내몰았던 적장들도 사라졌기에 더욱 그렇다. 한바탕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린 총선 열기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모두 쓸려가 버렸다. 천운인가, 아니면 민심인가. 근신하는 사이 우환이 어느덧 해결된 것이다. 총선 이후 한 달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한 시간이었다. 바람 잘 날 없던 정치싸움이 사라지고, 정치 신인들이 미래를 다짐하는 모습에서 잠깐의 평화를 맛보았다면 과장이 아닐 것이다. 먼 항해를 준비하는 출범의 설렘도 있었다. 먼바다에 격랑이 일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도 교차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인가, 적막은 뇌우(雷雨)를 예고한다.

▼국민에게 위로의 말부터▼

내가 어느 자리에선가 만난 주한 외국 대사는 탄핵사태를 ‘핏대(temper insanity)’로 간략히 요약했다. 홧김에 불을 질러 초가삼간 다 태운 꼴, 또는 정신 나간 싸움쯤으로 이해하는 이 외국 대사는 한국의 정치를 ‘격돌의 정치’로 유형화했다. 핏대를 세워야 뭔가 풀린다는 것인가. 그래서 조순형은 대구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최병렬은 초라하게 퇴장하고, 추미애는 배역을 받지 못했다. 스스로 죽음의 계곡으로 찾아 들어간 꼴이다. 이른바 ‘핏대 정국’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대통령이 귀환한다면, 내일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할 모양이다. 국민들을 정말 진솔하게 위로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여당 원군들에게 총선 압승을 뽐내며 ‘나 잘했지?’ 하는 식의 승부사적 표정은 제발 짓지 말 것을 기대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인간적으로 매혹적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혹시 TV 화면에 잠깐이라도 비칠라치면 사람들의 마음에 어둠이 사라지고 뭔가 작은 희망이 생겨날 정도가 돼야 한다. 르윈스키 스캔들이 한창 미국을 강타할 때 ‘Still, I love him(아직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어느 중년 미국인의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정치학자들이 수없이 제시하는 현학적 개념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사랑받는 대통령을 갖는 것이라고 간단히 규정하고 싶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Still, I worry him(나는 아직도 그를 걱정한다)’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나만의 심사는 아닐 듯하다. 귀환하는 대통령이 뭔가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이다. 천심은 그를 돌아오게 하겠지만, 민심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리라.

우선, 대기하고 있는 개혁메뉴들이 새로운 싸움을 예고한다. 매스컴에 흘려진 리스트만 보더라도 여간한 것들이 아니다. 정간법 개정은 언권(言權) 투쟁을 촉발할 예정이고, 국보법 철폐는 보혁(保革) 투쟁을, 친일청산법 개정은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역사의 앙금을 모두 떠올릴 예정이다. 여기에 이라크 파병동의안이 17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재론에 부쳐질 것이다. 의욕이 충만한 민노당이 내놓을 메뉴는 메가톤급이다.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서울대 폐지, 전월세 인상률 제한, 비정규직 문제 등등 하나같이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완급조절-분쟁조정 나서야▼

올드 보이들의 퇴장에 이어 진보 인사들이 장악한 ‘386국회’는 또 어떤가? 386세대이거나 운동권적 사명에 청춘을 바친 정치 신인이 줄잡아 130여명에 이른다면, 제헌국회가 따로 없다. 정치발전의 분명한 징후지만, 투쟁의욕이 더 앞서는 것도 문제다.

총선 이전의 정치가 대통령과 국회간 ‘충돌의 정치’였다면, 이제는 개혁을 향한 ‘과속경쟁의 정치’가 될지 모른다. ‘386국회’는 누가 뭐라 해도 전광석화의 혁신정치를 시도할 것이다. 그래서 돌아온 대통령이 할 일은 완급조절과 분쟁조정이다. 저마다 과속경쟁에 나서면 국력은 탕진된다. 대통령은 안정 심리를 북돋우는 노련한 연금술사가 돼야 한다.

송호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사회학hknso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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