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칼럼]'먹고 살 방법' 토론해야

  • 입력 2004년 1월 13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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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19일 점심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날 재계 총수들과 식사를 함께 들며 경제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돼 있다.

이 자리에 참석하는 기업인들은 누구인가. 삼성, LG, 현대차 등 대기업 그룹의 수장들로 전경련 회장단이다. 각 그룹의 연 매출액은 수십조원,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몫이 엄청 크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이 이끄는 동아제약도 덩치로 따지면 이들 그룹엔 못 미치지만 매출액 수천억원의 제약업 간판 기업이다. 노 대통령이 한때 관여했던 장수천이라는 조그만 생수회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회사를 지휘하는 총책임자들인 것이다.

▼盧대통령-재계 19일 회동 ▼

대통령은 먼저 경영분야에서 고수(高手)격인 이들에게서 한수 배우겠다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장수천마저도 제대로 경영하지 못해 부실투성이로 만들었으니…. 물론 기업 경영과 정치는 다르므로 똑같은 잣대로 재면 무리이긴 하다.

하지만 양자(兩者)가 비슷하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적잖다.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 최고 성과를 내려 한다는 점에서 경영과 정치는 유사한 원리로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의 최고경영자(CEO)형 국가지도자가 선호되기도 한다.

노 대통령은 이날 아마도 앞으로 민생 살리기에 힘쓸 것이니 기업들도 협조해 달라고 말할 것이다. 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기업들이 투자를 활발히 하고 일자리를 늘리라고 촉구할 것이다.

기업인들은 무슨 말을 할까. 대선 비자금 수사를 빨리 매듭짓고, 정부가 각종 규제를 풀고, 노사정책에서 형평을 지켜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런 대화가 의례적으로만 이뤄진다면 별 효과가 없다. 점심 자리 분위기를 예상해 보자.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아 준비된 자료를 들춰 보며 말하고 불편한 자세로 맛없는 식사를 하는 상황…. 더욱이 대통령이 거의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기업인들은 듣기만 한다면….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과 처음 오찬 간담회를 가진 것은 작년 6월 1일 일요일이었다. 편하게 만나자는 취지에서 삼계탕집에서 노타이 차림으로 앉았다. 이번엔 월요일에 만나니 넥타이를 매고 격식을 차리리라. 그러나 노타이 차림 때보다 더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은 이번에 무분별한 정치논리, 무리한 대선 공약 등에 매달리지 않을 것임을 밝혀야 한다. 수사(修辭)로만 그칠 게 아니라 실천 방안을 공개해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지금 투자가 왕성하지 않은 것은 어지러운 정치판 탓에 경영환경이 불투명해졌기 때문 아닌가. 재계가 대통령을 믿지 못하고 대통령을 바라볼 때마다 불안하기 때문 아닌가.

재계 대표들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해야 한다. 혹시 목소리를 높였다가 내 기업이 모난 정을 맞지 않을까 걱정이야 되겠지만 설마하니 대통령이 그럴 만큼 포용력이 없으랴. 평소에 간접적으로 대통령에게 고언(苦言)을 자주 던지는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참석하면 좋으련만….

▼쓴소리-속내 마음껏 털어놓아야 ▼

과거 몇몇 대통령은 재계 총수와 독대하면서 투자도 강요하고 거액의 정치자금도 친히(?) 접수했다. 당시엔 정부 말을 듣지 않으면 세무조사로 하루아침에 기업 문이 닫히기에 대부분 기업인은 고분고분 따랐다. 물론 정부가 권유하는 투자는 땅 짚고 헤엄치기식 특혜성 사업도 많았다.

이제 세상이 크게 바뀌었다.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상명하복 관계가 아니라 국가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로서 토론을 벌여야 한다.

19일 점심이 대통령과 기업인 사이의 기(氣) 겨루기 경연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와 뜻을 모아야 한다. 수천만 국민이 무얼 먹고 살아야 할지, 정부와 기업은 뭘 해야 할지를 흉금을 털어놓고 진지하게 논의하시라.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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