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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1월 29일 00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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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인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사진) 선생이 1956년 민주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된 이후 47년 만에 그 법통을 계승한 민주당호의 선장이 된 것이다.
조 선생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공부(알려진 것과 달리 박사학위는 취득하지 않았음)한 뒤 연희전문학교 교수와 신간회 총무 등을 지내면서 항일 투쟁으로 2차례에 걸쳐 5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광복 후 한민당 창당멤버, 미 군정시 경무부장, 1953년 내무부 장관을 지낸 뒤 1954년에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면서 민주당 창당에 핵심역할을 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재선됐으며 1960년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가 갑작스러운 발병(發病)으로 선거 1개월을 앞두고 미국 월터리드육군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던 중 작고했다.
열린우리당은 최근 민주당으로부터의 분당을 앞두고 민주당의 적통(嫡統)을 잇는 조 의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조 대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병옥 선생의 3남인 그는 경선과정에서 “신익희(申翼熙) 조병옥 박순천(朴順天) 정일형(鄭一亨) 김대중(金大中)으로 이어져온 대한민국 야당의 뿌리를 굳건히 지켜내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다. ‘미스터 쓴소리’로 통하는 조 대표는 TV 토론에서 “나는 선친의 고집은 닮았지만, 결단력은 닮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조 대표의 친형인 고(故) 조윤형(趙尹衡) 의원 역시 민한당 총재 등 줄곧 야당 생활을 했으며 90년 국회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 조 대표의 부인은 연극인 김금지(金錦枝)씨로 ‘극단김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조 대표는 부인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애처가로 알려졌다. 김 씨가 전화를 걸면 어떤 약속도 취소하고 함께 식사를 할 정도. 김씨는 서울 명동에서 구둣방을 운영하면서 정치에 투신한 조 대표를 대신해 오랫동안 생계를 꾸려 왔다. 김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남편이 ‘대표 경선에 안 나간다’고 해서 ‘민주당 살리는 게 뭐가 나빠요. 나가 보세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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