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좋은 대통령은 국민이 만든다

  • 입력 2003년 10월 21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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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덕유산에 올랐다. 수려한 풍광에 온 몸을 맡기고 보니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하산 길에 문제가 생겼다. 산행대장을 앞세우고 내려오는데 그만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얼굴을 찌르는 산죽(山竹)숲을 헤치며 “이거 산행대장 재신임감이구먼. 그만 하야하시지. 아니 이건 탄핵감이야” 등 농담을 할 때만 해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다들 말을 아꼈다. 앞장 선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괜찮아, 괜찮아”를 되풀이했다.

▼정치인 잘못 절반은 국민 책임 ▼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나는 지난해 대통령선거 때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가 없다. 그리고 이 ‘수요 프리즘’난을 통해 노무현 정권의 문제점에 대해 줄기차게 비판을 가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쯤 해서 우리 국민이 더욱 크게 보았으면 한다.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나라 전체를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 먼저 고민해봤으면 한다.

현재 우리 정치가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특정 정치인의 능력과 자질에 초점을 맞추면 문제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온갖 구조적 요인이 얽힌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정치가 이 혐오스러운 상태를 쉽사리 벗어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노태우 정권의 말기에 대통령의 ‘권력 누수’라는 ‘희한한 현상’을 처음 경험한 바 있다. 그때의 당혹스럽던 기분은 지금도 새롭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아예 ‘대통령의 부재’라는 말까지 생겼다. 김대중 정권 때는 대통령이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다행일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노무현 정권에 이르고 있다. 한눈에 봐도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면 달라질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보이던 무렵, 한나라당의 고위인사가 ‘집권 1년 후’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직접 들은 일이 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마땅한 인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이 있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고 희색이 만면하던 정치인들이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대안의 전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문제는 이 난국을 타개할 뾰족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서구의 대표적인 정치학자들이 30년 전에 공동으로 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책은 오늘날 우리 상황을 마치 예견이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민주적 참여가 증대할수록 정부의 관리능력은 현저하게 약화되고 따라서 정치지도자의 권위는 실추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이 딜레마를 극복할 것인가?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이들은 ‘민주주의의 과잉’을 주목한다. 국민이 ‘자유와 책임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는 것’,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자제 또는 완화가 위기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정답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 현실을 냉철하게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정치가 파행을 거듭하고 제2, 제3의 ‘노무현’이 출현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등질 수는 없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도록 지혜를 짜야 한다.

▼능력 발휘하도록 이끌어가야 ▼

결국 문제는 국민이다. 정치인들을 욕하지만, 그들도 우리 중에서 뽑힌 사람들이다. 저들이 잘못한다면 그 책임의 절반 이상은 국민 몫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만 ‘눈높이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썩은 인간’들이라고 내친다고 될 일이 아니라면,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그나마 그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좋은 대통령은 국민이 만드는 것이다.

참, 그날 우리 일행은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 덕분에 화성의 붉은빛도 육안으로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맨 지도자를 ‘복권’시켜 주면서 즐겁게 건배를 나누었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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