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놀이 위장 식사-선물 제공…총선 ‘밑밥 뿌리기’

  • 입력 2003년 10월 12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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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7시20분경, 서울 강남구의 한 지하철역 앞에 등산복 차림의 40, 50대 주부 150여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지하철역 앞에 세 대의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고 버스 앞에는 음식과 음료수를 담은 박스가 쌓여 있었다. 이날 산행의 명칭은 S산악회가 개최한 ‘오대산 처녀등정대회’. 이 산악회는 최근 급조돼 이날 첫 등정 행사를 갖는 신생 산악회. 산행에 나선 주부들 입에서는 산악회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내년 총선에서 모정당 후보 공천을 받으려는 것으로 알려진 시의원 A씨의 이름이 더 자주 오르내렸다. 기자는 신분을 감추고 버스에 동승, 이들을 지켜봤다.》

버스가 출발하자 산악회의 한 40대 남자가 김밥과 음료수, 오이, 사탕 등과 함께 ‘참가증’이라고 적힌 흰 종이를 나눠줬다. 그는 “참가증에 이름, 주소, 연락처를 적어 참가비 1만원과 함께 제출해 달라”고 말했다. 간혹 참가비를 안 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주최측은 독촉 없이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잠시 후 한 주부가 “너무 준비가 덜 돼 있네. 버스 안에서 노래도 좀 부르고, 춤도 추고 놀게 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녜요”라고 불만을 토로하자 그 40대 남자가 다가가 설명했다.

“제가 15년 동안 이 당에서 일했는데요, 예전에는 위에서 잘 봐줘야 국회의원 공천이 됐는데 요즘은 당원들이 투표로 공천자를 뽑잖아요. 이번에 세몰이 하느라 급하게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이 서투르니 이해해 주세요.”

다른 한 주부는 “내가 오늘 8명을 데려왔다”고 자랑했다. 그는 “동별로 사람을 모으는 책임자가 있고, 한 동에서 50∼100명씩 모았다”고 귀띔했다.

오전 11시40분경 버스가 강원 오대산에 도착했다. 강남 곳곳에서 출발해 이곳에 모인 버스는 모두 16대. 산행에 참가한 사람은 750여명이었다.

도착 직후 시의원 A씨의 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A씨 부인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돌아다니며 주부들에게 “시의원 ○○○의 안사람입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참가자들이 소금강과 구룡폭포 등을 둘러보고 다시 모인 오후 4시경.

버스가 출발하기 전 A씨 부인은 16대의 버스에 일일이 올라 돼지고기와 떡 등을 돌리며 “산행은 즐거우셨어요? 저는 시의원 ○○○의 안사람입니다”라고 거듭 인사했다.

주최측의 40대 남자들도 곳곳에서 바람을 잡았다. 이들은 주부들에게 다가가 “A의원 부인 정말 예쁘죠” “얼굴만 예쁘나? 마음은 얼마나 착한데요” “A의원은 정말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에요. 잘 아시죠”라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한 남자는 주부들에게 “A의원이 내년에 큰일을 시작하려 하니 많이 도와달라”며 은근히 총선을 겨냥한 듯한 말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산악회측은 참가자들에게 2만7000원 상당의 조끼를 나눠줬다.

이때 오대산 등반객을 취재하러 온 모 방송사 기자들이 접근하자 주최측은 조끼를 나눠주다 말고 급히 버스를 출발시켰다.

이후 산악회장은 “절대 공짜로 드리는 게 아니다. 다음 산행 때부터 2000원씩 12개월 할부로 조끼 값을 받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최측의 한 남자는 주부들에게 따로 “다 형식적인 겁니다. 걱정 말고 그냥 가져가세요”라고 알려줬다.

한 주부가 “공짜 구경 시켜주고 옷까지 줘서 고맙다”고 하자 다른 주부가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꼭 돈 내고 갔다 왔다고 해야 한다”며 입단속을 시키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주부 박모씨(50)는 “요즘 국회의원 공천이 상향식으로 결정된다니까 미리 환심 사려고 이러는 거 아니겠느냐”라며 “우리야 참가비 1만원에 단풍 구경 실컷 하고 배불리 먹고 노니 즐거울 뿐”이라고 말했다.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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