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에게 듣는다]"대통령 실천앞서야"

  • 입력 2003년 7월 3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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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 원로인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1일 서울 강남의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지금같은 사회 혼란 상황에서 법치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전영한기자
법조계 원로인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1일 서울 강남의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지금같은 사회 혼란 상황에서 법치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전영한기자
《여야 노사 보혁 세대간 등 우리 사회의 각 분야와 위치에서 집단과 개인간의 갈등과 반목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법질서가 무시되고 나라의 기강이 흔들린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위기에 처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법조계의 원로인 김용준(金容俊) 전 헌법재판소장을 찾았다.

평소 지론이 ‘법과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인 김 전 소장은 “사회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은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를 우선시하는 풍토 때문”이라며 법치주의의 구현을 역설했다.

김 전 소장은 또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다양한 가치를 지닌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가는 데 있다”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이런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사회가 갈수록 혼란스럽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그 사회가 무엇에 의해 다스려지느냐에 따라 인치, 관치(官治), 법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제 세계가 한 사회처럼 통합되면서 시민들의 행동양식도 전통적인 방식에서 탈피해 글로벌 스탠더드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통사정’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인치, 관치에서 법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사회의 혼란은 법치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데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법치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단 하루도 시위가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각 이해집단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원로로서 한마디 해 주신다면….

“(단호한 어조로) 각 이해집단이 의견을 개진하더라도 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해야지 무조건 집단행동으로 나서는 것은 안 됩니다. 이런 방식은 효과가 없을뿐더러 설사 현재 효과가 있더라도 앞으로는 효과가 없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비해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대접받는 노동자들이라는 노 대통령의 말은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파업은 집단화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의 밥그릇을 빼앗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 조금씩 양보하되 불법에 대해서는 정부가 강력하게 대처해야 법과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정치가가 아니어서…. (조심스러워하는 어투로) 지도자란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리더란 희망의 상인이다’고 말했습니다. 지도자란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참여정치’라는 말이 유행인데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대선 당시 유력한 후보자 두 명이 모두 법률가 출신이어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법치주의가 실현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 대통령이 과연 법치주의를 확고하게 구현할 의지가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노 정부가 법과 원칙을 중시하지 않고 있다는 건가요.

“우리나라는 삼권분립과 의회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즉 국민의 의사는 의회를 통해 수렴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회의 의견은 경시되고 시민단체 등 의회가 아닌 곳의 의견이 중시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시민단체의 의견을 무시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대통령이 경청하되 참고만 하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의견 수렴기관을 제쳐두고 특정 단체나 집단의 의견을 중시하거나 대중의 정서에만 영합한다면 이는 일종의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사람을 ‘피아(彼我)’로 구분해 코드가 맞는 사람의 얘기만 귀를 기울인다는 지적이 많은데….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가치와 의견이 공존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다양한 가치와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토론을 거쳐 하나의 결론에 이르고 합의가 안 되면 다수결로 가는 게 민주주의의 원리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가치와 주장을 외면하면 전체주의 사회가 됩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이라고 하면서도 그동안 편 가르기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운 듯한 표정으로) 특히 새 정부 들어서 이런 현상이 심해진 느낌입니다.”

―평소 ‘사법 적극주의’를 강조하셨는데….

“고정된 법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차이를 어떻게 줄이느냐가 법률가의 책무입니다. 법과 현실의 틈이 클수록 법률가는 국민에게 외면당하기 마련입니다. 사법부가 적극 나서면 사회, 정치 개혁도 가능한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특별검사 수사기간 연장을 거부한 것은 어떻게 보시나요.

“특검법상 수사기간의 연장 승인권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수사기간 연장의 필요성은 특별검사가 가장 잘 알 테니까 특검이 직무범위를 일탈하지 않았다면 대통령은 승인해주는 게 바람직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야당은 다시 특검법을 만들겠다고 하는데….

“(손을 내저으며 언급을 피하려다) 그것은 국회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다만 150억원이라는 거액이 누구의 손에 들어갔다고 하니까 특검이든 검찰이든 그 사용처를 밝혀야 한다고 봅니다.”

―노 대통령은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흔들기’나 ‘발목잡기’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실 언론의 보도태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언론보도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사례를 한참 든 뒤) 그러나 언론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비판 아닙니까. 밀턴은 ‘언론의 자유가 사라지면 진리가 죽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노 대통령을 비판하는 신문의 독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많은 독자들이 보는 신문이라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노 정부의 청와대 참모와 행정부 각료에 대해 평가하신다면….

“청와대건 행정부건 나이든 사람들의 경륜과 지혜, 젊은이들의 패기와 발랄함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양성이 부족하고 너무 사고가 획일화되어 대통령의 부족한 부분을 제대로 보완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강금실(康錦實) 법무부장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쾌활하게 웃으며) 잘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가정법원장으로 재직할 때 강 장관이 판사로 있었는데 아주 똑똑하고 일을 무섭게 잘 했습니다. 또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법을 제대로 집행하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아 평가해주고 싶습니다.”

―아주 건강해 보이시는데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매일 아침 6시45분경에 집에서 나와 40여분씩 수영을 합니다. 골프도 조깅도 못하니까 이거라도 해야죠.”

―끝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확신에 찬 어조로) 희망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실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앞날을 밝게 볼 수 있는 요소가 되지요. 또 독일의 빌헬름 레프케는 ‘휴머니즘의 경제학’에서 ‘나라의 장래가 아무리 암담해도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 법을 지키는 법관,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 이 세 부류가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면 그 사회에 희망은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소장은 인터뷰 끝에 “노 대통령은 스스로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노 대통령이 발언할 때마다 조마조마하다”고 털어놓은 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가급적 말은 줄이고 실천을 통해 자신의 국정철학과 정책을 보여주는 자리”라며 “노 대통령을 만나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리=하종대기자 orionha@donga.com

▼최근 사회현상에 대하여▼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이날 호주제와 이혼 문제 등 최근 들어 관심과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른 일반적인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신과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했다.

김 전 소장은 호주제 존폐와 관련해 “현재 상징적인 의미 외에 호주의 실제적 권한은 거의 없다”고 전제한 뒤 “따라서 호주제를 존속시키든 폐지하든 별 문제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재혼한 여성의 아이는 엄마의 성을 따르든가 아니면 새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해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전 소장은 또 우리 사회의 이혼 급증 현상에 대해 “이는 옳고 그름보다 좋고 싫음을 먼저 따지는 젊은이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좋을 때만 있을 수 있겠느냐”며 “이혼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는 태도가 아쉽다”고 말했다.

김 전 소장은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이겨내고 사법고시에 합격, 대법관을 거쳐 헌법재판소장까지 지낸 입지전적인 법조계 원로.

그는 장애인 문제와 관련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며 “그러나 아직도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또 “사기업에는 장애인 의무고용제도를 강요하면서 정작 중앙부처나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 의무고용률 3%를 지키지 않는 곳이 많다”며 “정부가 과연 장애인을 위해 진정으로 애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꼬집었다.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법조문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사법 적극주의자로 꼽힌다. 1994년 대법관 시절 생수 시판을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 10년간 끌어온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생수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2000년 헌법재판소장 재직 시절엔 과외 금지 법률이 헌법에 보장된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위헌 법률이라고 결정, 파란을 일으켰다. 3세 때 앓은 소아마비로 지체장애인이 됐지만 서울대 법대를 거쳐 사법고시에 최연소자로 합격했다.

△1938년 서울 출생 △사시 9회 △서울가정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법무법인 율촌 고문변호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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