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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월 2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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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34차 한미(韓美) 안보연례협의회(SCM). 양국 국방장관은 사상 처음으로 앞으로 20∼30년, 통일 이후 주한미군의 청사진을 공동 연구하는 약정서를 체결했다. 주한미군의 반세기를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미래를 논의하는 시대로 진입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미동맹의 핵심 축인 주한미군은 한국 근대사의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온 ‘고정 변수’였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남북관계의 변화, 21세기 미국의 신(新) 세계전략에 따라 주한미군은 이제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청사진=주한미군의 미래 연구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한국국방연구원(KIDA)과 미 랜드(RAND)연구소는 92∼94년 냉전이 붕괴된 후 남북 관계 개선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중장기 위상에 대한 공동연구에 착수했다.
당시 연구결론은 통일 이후 양국의 동맹관계는 ‘대북 억제’에서 ‘지역 안보’로 나아가야 하며 이에 맞춰 주한미군의 기능과 규모, 지휘체계 등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주한미군의 청사진을 마련하려는 양국의 약정서에 대해 차영구(車榮九) 국방부 정책실장은 “종전에 연구소가 ‘밑그림’을 그리는 차원에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완성해 가는 단계”라며 “2년 내에 주한미군의 미래상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한미군의 청사진을 결정하는 주 요소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남북관계의 진전 여부다. 남북간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면 주한미군의 기능과 임무, 규모의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에 대한 양국의 인식 변화도 주요 고려사항. 20∼30년 후, 또는 통일한국 시대에도 한미동맹이 서로에 이익을 준다는 공감대가 과연 유지될 것인지가 주한미군의 위상을 결정짓는 주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9·11테러 이후 달라진 미국의 방위전략과 국방정책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국방연구원 김재두(金載斗) 박사는 “주한미군 문제는 남북관계를 넘어 미국의 변화된 세계 안보전략차원에서 논의될 것이며 그 방향에 따라 미래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주한미군의 미래 전력=주한미군의 미래 구상 중 최대 관심사는 역시 전력(戰力) 개편 문제다. 양국은 “아직 구체안이 없다”고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지상군 축소’와 이에 따른 ‘해공군력 강화’로 가닥을 잡고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위기 발생시 ‘가벼우면서도 기동성 있는 전력’으로 대응한다는 원칙은 이미 2001년 미국의 신 국방정책에서 공개됐다.
또 해외 주둔 미군 전력의 재배치와 대테러전 및 이라크전을 계기로 미국의 세계 전략의 ‘무게 중심’이 중동과 아프리카로 옮겨가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배경들을 감안하면 주한미군 지상 병력은 단계적으로 줄어들면서 화력과 기동성을 강화한 신형기동여단(IBCT)을 비롯해 무인전투기(UCAV) 같은 첨단 해공군 전술무기가 늘어나는 ‘질적 개선’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이정민(李正民) 교수는 “남한과 일본에 10만 병력을 유지한다는 미국의 아태(亞太) 전략의 효용성은 90년 걸프전 이후 정밀 타격 등 첨단 군사기술의 발달로 상당히 떨어졌다”며 “따라서 미국이 3만7000여명의 주한미군을 언제까지나 그대로 둘 것이라는 예상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희망 사항”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국방연구원 김창수(金昌秀) 박사는 “주한미군은 남북화해를 통한 한반도 평화통일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고 통일 이후에도 동북아 전략 균형을 이룰 ‘안전판’”이라며 “주한미군의 청사진에 대한 결정은 한미간 긴밀한 조율을 통해 국민적, 정책적 공감대를 이뤄 나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주한미군 변천사▼
현재 주한미군은 주독미군(7만여명)과 주일미군(4만3000여명) 다음으로 많은 3만7000여명 수준이다. 그러나 그 규모는 한미동맹의 ‘부침’(浮沈)과 미국의 국방정책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50년대 미국 아이젠하워 정부는 재정 적자 축소를 위해 해외 원조를 대폭 삭감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국의 최대 군사 지원 대상국이던 한국은 ‘1차 대상’에 올랐고 1957년 주한미군은 7만명에서 5만명으로 감축됐다.
1969년 7월 발표된 ‘닉슨 독트린’은 주한미군 ‘2차 감축’의 계기. 당시 닉슨 미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재래식 전쟁이 발발할 경우 1차적 책임은 당사국이며 미국은 선택적이고 제한적 지원을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71년 6월까지 아시아지역에서 총 4만2000여명의 미군 철수를 추진했고 70년 7월 주한미군 소속 미 7사단 2만명도 철수를 완료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77년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했던 지미 카터 미 대통령도 당선 후 구체적인 실행에 돌입했다. 그러나 당시 미 의회 및 군부의 거센 반대와 소련의 아시아 확장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결국 78년 4월까지 3000명을 추가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후 냉전 종식으로 미 국방부는 1990년 아태(亞太)지역 미군 전력의 10∼12% 축소를 골자로 한 ‘동아시아 전략구상’을 발표했다. 이 전략엔 미군의 임무를 ‘주도적 역할(Leading Role)’에서 ‘지원 역할(Suppor-ting Role)’로 점차 변경하고 주한미군도 단계적으로 감축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92년 7000여명의 주한미군이 추가로 철수하고 94년 한국군이 평시 작전통제권을 되찾게 됐다.
군사 전문가들은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에 69만명의 미 본토 병력을 포함한 전투요원과 총 1000억달러에 상당하는 장비를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며 “주한미군은 바로 유사시에 이들을 불러들이는 ‘인계철선(trip wire)’의 역할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주한미군 철수때 후유증은▼
성급한 가설이긴 하지만 만약 주한미군의 철수가 현실화된다면 우리 사회에 닥칠 경제 및 정치 외교적 후유증은 얼마나 될까.
우선 국방비의 대폭적인 증액이 불가피하다. 국방부에 따르면 주한미군의 전투장비 가격과 운영 유지비는 연간 140억달러(약 15조원). 이 중 주한미군이 보유중인 M1 전차, 브래들리 장갑차 등이 17억5000만달러, F16을 비롯한 공군 최신예 항공기와 무장력이 84억8500만달러에 이른다.
또 주한미군은 고가의 첩보위성과 U2 정찰기 등을 통해 전략정보 100%, 전술정보 70%를 한국군에 제공하고 있다. 북한을 24시간 중첩 감시하는 미국의 각종 정보 자산의 가치는 수백억달러에 이른다는게 국방부의 계산이다.
이 같은 주한미군 전력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매년 최소 50억∼100억달러 이상의 추가 예산이 필요하고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2.7%인 국방예산을 최소 5∼6%까지 올려야 한다. 군 복무 기간의 연장도 불가피하다. 그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철수로 한반도의 심리적 안보효과가 사라지면 국내에 투자하고 있는 해외기업 상당수가 철수하는 등 수십억달러 이상의 국부(國富) 유출 사태가 초래될 수 있고 대외 신용도도 하락할 수 있다. 외교적 입지도 좁아진다.
필리핀의 경우가 참고가 된다. 거센 반미시위로 91년 미군이 철수한 뒤 필리핀은 51억달러 규모의 군 현대화 계획을 세웠으나 경제난으로 포기했다. 또 반군의 테러와 정국 불안으로 상당수의 해외 투자기업들이 빠져나가 경기 침체가 계속됐고 결국 2001년 말 미국측에 재주둔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필리핀의 사례는 국방비용 확보와 확고한 안보체제 구축 없이 ‘명분’이나 ‘감정’ 차원에서 미군 철수를 요구했을 때의 부작용을 잘 보여준다”며 “독일이 통독 이후에도 10년 넘게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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